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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현한금섬이소사충렬문 (宋象賢 韓金蟾 李召史 忠烈門) 본문

통합청주시/흥덕구(興德區)

송상현한금섬이소사충렬문 (宋象賢 韓金蟾 李召史 忠烈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0. 6. 18. 11:20

 

 

 

 

 

 

 

 

 

 

 

 

 

 

 

 

수의동 천곡송상현묘지(守儀洞 泉谷宋象賢墓地) (tistory.com)

 

수의동 천곡송상현묘지(守儀洞 泉谷宋象賢墓地)

강상촌에 위치한 천곡 송상헌의 유적지는 많이 가보았지만 조금 옆에 있는 무덤은 지나는길에 바라보며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오랫만에 시간내어 무덤을 찾아보았다. 여산송씨들의 재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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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에 있는 송상현(泉谷 宋象賢, 1551~1592), 한금섬(韓金蟾), 이소사(李召史)의 정려문.
[개설]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과 그의 두 소실이었던 한금섬이소사의 정절을 함께 기려 세운 정려문이다. 본래는 1595년(선조 28) 송상현만 정려되었으나, 1704년(숙종 30)에 두 소실이 정려됨에 따라 함께 모시게 된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1954년에 중수한 것이다.
한금섬은 본래 함흥(咸興)의 기생으로 송상현의 첩이었다. 13세에 송상현을 따라 동래(東萊)로 갔다가 임진왜란으로 동래성이 함락되고 동래부사 송상현이 순절할 때 곁에서 시중을 들다가 적에게 잡혀 3일간 항거한 끝에 순절했다.
이소사이양녀(李良女)라고도 하는데, 송상현의 소실로 임진왜란 때 동래에 있다가 왜적에게 잡혀 포로로 일본에 끌려갔다. 일본에서 풍신수길에게 수청을 들라고 할 때 죽기를 각오하고 항거하자 적장도 그녀의 절의에 탄복하여 풀어주었다. 그후 귀국한 후에 송상현을 위하여 3년 복상(服喪)을 하였다고 한다.
[위치]
흥덕구 강서사거리에서 가로수길을 따라 경부고속도로 청주 IC 방향으로 약 3.3㎞ 가량 가면 오른쪽에 수의동 강촌마을이 위치하고 있는데 정려문은 마을 입구 놀이터의 가운데에 있다.
[형태]
이 정려문은 평지보다 높게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삼문형식으로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된 홑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홍살은 없고 주위에 보호 철책만 둘렀다. 높은 자연석 기단 위에 있는 주춧돌은 자연석을 가공한 원형의 하부와 귀접이 한 사각 고주의 상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위에 귀접이한 사각기둥을 세웠다.

가구형식은 3량가이며 창방과 장여 사이에 삼소루화반(三小累花盤)을 두었다. 단청은 모로단청으로 하였다. 건물 내부는 흙바닥으로 되어 있으며, 중앙 기둥에 오른쪽부터 송상현, 한금섬, 이소사의 정려 편액을 차례로 달았는데 송상현의 편액을 두 소실의 편액보다 조금 높게 달았다.
송상현의 편액 위에는 1954년에 성기운(成璣運)이 기록한 ‘宋忠烈公旌閭重修記(송출열공정려중수기)’가 걸려있고, 한금섬이소사의 편액 뒷면에는 각각 두 소실의 가계와 열행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금석문]
송상현의 편액은 “忠臣通政大夫行東萊府使東萊鎭兵馬僉節制使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知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成均館事諡忠烈公宋象賢之閭 萬曆二十三年乙未命旌 崇禎七十七甲申年改立(충신통정대부행동래부사동래진병마첨절제사증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지경연사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사성균관사시충열공송상현지려 만력이십삼년을미명정 숭정칠십칠갑신년개립)”이라고 새겼다.
중앙의 한금섬의 편액은 “烈女韓召史金蟾之閭 崇禎七十七年甲申五月日命旌(열녀한소사금섬지려 숭정칠십칠년갑신오월일명정)”, 왼쪽 이소사의 편액은 “烈女李召史之閭 崇禎七十七年甲申五月日命旌(열녀이소사지려 숭정칠십칠년갑신오월일명정)”이라고 새겼다. 그리고 편액 뒷면에는 각각 두 소사의 가계와 열행내력을 기록하였다.

 

 

[현황]
충렬문의 오른쪽에 1983년 3월에 세운 송상현신도비의 번역비가 있다. 번역비는 화강석으로 된 거북대좌 위에 높이 235㎝, 폭 75㎝, 두께 42㎝의 오석 비신을 세웠으며, 그 위에 앞뒤로 각각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함께 물고 있는 모습의 이수를 얹었다.
원래의 신도비가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점차 아는 이가 적어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13대손 송칠용(宋七鏞), 송원용(宋源鏞), 송신용(宋信鏞)과 14대손 송해운(宋海雲), 송해현(宋海玹) 등이 상의하여 단국대학교 박천규(朴天圭) 교수에게 부탁해서 국한문으로 번역하고, 14대손 송해석(宋海碩)의 글씨로 번역비를 세운 것이다.
신도비가 건립된 이후에 추증된 관직을 추가로 첨가하였으며, 중국연호를 조선왕조의 묘호(廟號)로 바꾸어 이해를 돕게 하였다. 둘레에는 화강석으로 된 보호 난간을 둘렀다.
[의의와 평가]
여산송씨(礪山宋氏) 문중의 화합과 충효사상을 고취시키는 상징적인 건물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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