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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북면 증약리 군수황종림불망비(郡北面 增若里 郡守黃鍾林不忘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군북면 증약리 군수황종림불망비(郡北面 增若里 郡守黃鍾林不忘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11. 3. 06:34

 

군수 황종림(郡守 黃鍾林)의 영세불망비이다.

증약역 찰방비와 섞여 있어 옥천군지에는 군수 황종림을 찰방으로 오기(誤記)하여 놓았다.

 

황종림은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헌종9년(1843년) 7월에 옥천군수(沃川郡守)에 제수되였다.

 

 

 

비석의 전면에는 행군수황후종림불망비(行郡守黃侯鍾林不忘碑)이라고 음기되여 있다. 비갓은 파손되여 있다.

충청감영계록(忠淸監營啓錄)○헌종(憲宗) 11년(1845) 2월 29일

청주목(淸州牧)의 만동묘(萬東廟)를 매년 봄가을 사이 한 차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봉심(奉審)하도록 하는 일이 새로 계하(啓下)한 정식(定式)으로 있었습니다. 신(臣)이 올해 2월 28일에 청주목에 순도(巡到)하여, 수령과 유사(攸司)인 청주 목사(淸州牧使) 이규헌(李奎憲), 옥천 군수(沃川郡守) 황종림(黃鍾林)이 묘우(廟宇) 안팎을 안동(眼同)하여 봉심하였습니다.
묘내(廟內)의 포진(鋪陳 자리를 깖. 또는 그 자리)과 영외(楹外)의 백문 지의(白紋地衣)가 드문드문 빛깔이 변하고 해어져서 못쓰게 되었고, 묘액(廟額)인 ‘만동묘’ 석 자는 곧 어자(御字)를 새긴 편액인데도 싸고 있는 홍사(紅紗)가 해가 오래어 모두 해어졌고, 편액이 있는 처마 앞에 따로 설치한 차풍판(遮風板 바람을 막는 널판)도 모두 썩어서 제대로 막아 보호하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묘(廟)의 왼편 비각(碑閣) 앞 담장에 무너진 데가 있어 영조척(營造尺)으로 재보니 길이가 12척(尺) 4촌(寸)이었고, 성공문(星拱門)은 곧 내삼문(內三門)인데 바깥 계단의 섬돌이 대체로 흔들거렸고, 환장사(煥章寺)의 운한각(雲漢閣)은 곧 황필(黃筆)을 봉안(奉安)한 곳으로서, 그대로 가서 봉심하였는데 탈이 없었으므로 연유를 치계(馳啓)합니다. 위에 말한 탈이 있는 모든 곳을 수리하여 고치는 등절(等節 항목)을 해당 조(曹)로 하여금 복계(覆啓)하여 품처(稟處)하도록 할 일입니다.

 

 

 

조선조시대의 군수는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동반(東班: 文官)의 종사품(從四品) 외관직(外官職)으로 군(郡)의 행정(行政)을 맡아보았다. 군수는 일반 국민을 직접 다스리는 목민관(牧民官)으로서 광범위한 권한을 위임받고 있었으나, 그 주된 임무는 공물(貢物)‧부역 등을 중앙에 조달하는 일이었다.

부윤(府尹: 從二品)‧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正三品)‧목사(牧使: 正三品)‧도호부사(都護府使: 從三品)‧군수(郡守: 從四品)‧현령(縣令: 從五品)‧현감(縣監: 從六品) 등은 그 품계(品階)에 고하(高下)는 있었으나, 행정상으로는 상하의 차별 없이 모두 관찰사의 지휘감독을 직접 받았으며 이들을 통칭 수령(守令)이라고 하였다.

전국(全國)을 모두 82군(郡)으로 경기도(京畿道)에 7곳, 충청도(忠淸道)에 12곳, 경상도(慶尙道)에 14곳, 전라도(全羅道)에 12곳, 황해도(黃海道)에 7곳, 강원도(江原道)에 7곳, 영안도(永安道: 咸鏡道)에 5곳, 평안도(平安道)에 18곳을 두었으며, 군내(郡內)에 불상사가 발생하면 현감(縣監)으로 강등(降等)시키는 일도 있었다[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