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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면 예곡리 박문강충신문(靑山面 藝谷里 朴文綱忠臣門)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청산면 예곡리 박문강충신문(靑山面 藝谷里 朴文綱忠臣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11. 9. 08:53

 

청산면 예곡리에 있는 박문강의 충신정려문에는 상산박씨충신정려(常山朴氏忠臣旌閭)라는 현판을 걸고있다.

 

 

예곡리(藝谷里)라 부르게 된 것은 “예실”이라고 부르는 옛말을 발음대로 한자를 쓴 것이다. 충정공 송시열의 친필 “예곡정사(藝谷精舍)”의 문구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예곡리는 자연마을로 윗예실과 신촌, 아랫예실 세개의 마을로 되어있다.

광산김씨(光山金氏)의 집성촌으로 호랑이 모양의 산세가 품고 있다는 마을 상예곡에는 1919년 김철수, 김인수, 김지수, 최남석 등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를 했던 나라 사랑이 남다른 충혼의 마을이기도 하다.

하예곡리는 능성구씨(陵城具氏)와 밀성박씨(密城朴氏)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예곡삼경이라하여 산세가 수려하고 보청천 맑은 물로 옥토를 이뤄 잘사는 마을이다. 또한 병자호란 때 박문강 충신을 기리는 충신비가 세워져 있다. 예곡초등학교는 1943년 4월 1일 문을 열어 1995년 3월 1일 폐교하고 그 자리에 천연염색을 하는 업체가 들어서 있다. 1955년에 설립한 천주교회 예곡공소, 1981년 개소한 예곡보건진료소가 마을의 명소이다.


마을뒤 산세가 끝나는 곳에 큰 바위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백호바위가 있으며, 이곳에서 풍류만을 즐기고 농사일과 시주공양에 인색한 주민들을 깨우치기 위해 한 스님이 백호바위 근처에 연못을 파면 마을에 부귀영화가 찾아올 것이라는 소문을 퍼트리자 온 동네 사람들이 농사일을 전폐하고 연못을 팠다. 그 결과 그해 농사를 망쳐 초근목피로 연명할 지경이 되어서야 깨닫고 순리대로 살며 마을이 합심단결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백호바위에는 음각된 서체가 남아있고 수령 300년이 넘는 느티나무와 버드나무들이 마을의 역사를 말해주고 마을 어른들이 이곳에 모여 마을의 대소사를 논하였으나 1960년말 하천제방의 축조공사로 그 흔적이 일부 사라져 아쉽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원당산, 매봉산과 팔음산에 발원한 예곡천으로 명당 중의 명당인 마을로 일제강점기에 예곡리(禮谷里)로 강제로 개명되었다가 2006년 11월 20일 예곡리(藝谷里)로 환원한 마을이다.해방이전에 준공된 예실저수지가 있다.[옥천문화원]

 

 

 

 

 

정려문의 정려편액에는 증선무랑군자감주부행선략장군훈련원주부박문강지려(贈宣務郞軍資監主簿行宣略將軍訓鍊院主簿朴文綱之閭)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정려는 숭정기원후4임신년(崇禎紀元後4壬申年.1812년)이며 중수(重修)는 단기4298(서기 1965년)년에 중수하였다.

 

 

 

 

 

박문강은 조선중기의 충신으로 본관운 상산이다. 박문강은 1636년(인조14년)병자호런이 일어났을 당시 종6품 훈련원 주부로 청군이 몰려오자 모두 혼비백산하여 자신의 자리를 지키지 않고 도망가기 바빳다.모두 달아나 춥고 배고프고 혼란스러운 중에서도 박문강은 끝까지 명령을 고수하고 청군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그만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끝까지 단신으로 나마 남아 장렬한 전사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벼슬이 낮은 관계로 200여년간 그 공적이 세월속에 묻혀있다가 1812년(순조12년)에야 그 전공이 밣혀지니 그때서야 충신으로 정려되기에 이르렀다.

정려문은 목와조 익공조2평으로 청산면 하예곡리 동네 맞은편 밭가운데 있다. 관리가 부실하다.

 

 

 

 

 

상산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지만 정려문 주위는 관리의 소홀로 인하여 정려문도 부실하며 잡초와 잡석등이 가득하다.

단청등도 모두 바래졌고 울타리등도 무너져 있으며 철문등도 부식하여 조속한 관리가 요구된다.

 

 

 

 

 

상주 박씨(尙州 朴氏)의 시조인 박언창(朴彦昌)은 신라 경명왕의 다섯째 아들로 사벌대군(沙伐大君)에 봉해지고 사벌주(沙伐州ㆍ지금의 상주)를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은 후 본국과의 교통이 단절되자 후사벌국을 창립하여 시조가 되었다. 박언창(朴彦昌)의 12세손 박려(朴侶)는 고려 충렬왕 때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상산부원군(商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상주(尙州)는 경상북도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상산(商山)이라고도 한다. 상산(商山)은 경상북도 서쪽에 위치하는 상주(尙州)의 옛 지명으로 본래 삼한시대(三韓時代)에 진한(辰韓)의 영토였으나 185년(신라 벌휴왕 2, 고구려 고국천왕 7) 사벌국(沙伐國: 혹은 사불국)으로 독립해 오다가 신라 첨해왕 때 정벌되어 상주(上州)로 고쳐 군주(君主)를 두었다. 진흥왕이 상락군(上洛郡)으로 고치고 신문왕 때 다시 사벌주(沙伐州)로 개칭되었다가 경덕왕 때 와서 상주(尙州)로 하는 등 많은 변천을 거쳐 고려 성종(成宗) 때 귀덕군(歸德郡)이라 하여 영남도(嶺南道)에 속하게 하였다. 1012년(고려 현종 3) 다시 상주안무사(尙州安撫使)로 고쳐서 8목(牧)의 하나로 정하였다가 조선이 개국하여 관찰사(觀察使)를 두었으며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 개정으로 상주목이 상주군으로 개편되었다. 1910년 상주군(尙州郡)으로 개칭되어 함창군(咸昌郡) 일원이 편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