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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면 의지리 도명화효자비(靑山面 義旨里 都命華孝子碑) 본문
청산면 의지리 의동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비석은 의동마을에서 의동저수지로 길을 걷다보면 저수지 둑방 밑으로 인삼밭이 보인다.
좌측으로 인삼밭이 끝나는 야산 기슭에 효자비가 자리하고 있다.
비석은 세로면이 길어 조금은 길다는 느낌이 들며 비갓에는 사군자를 도식하여 놓은것 같은 문양이 있다.
국화,대나무,소나무등의 모습이 비갓에 수놓아져 있다.
도명화(都命華)는(1757.영조33~1829.순조29) 자는 군명(君明)이며 호는 첨관재(添冠齋)이며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청산면 의지리 의동마을에서 태여 났으며 아버지는 도영문(都永文)이고 어머니는 성산여씨(星山呂氏)이다.도명화는 타고난 자질이 조심스럽고 중후하였으며 어릴때 부터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어느날 아버지가 병환이 위중하니 도명화는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직접 시탕하고 맛을 보며 약을 드시게 하여도 차도가 없으며 아버지의 목숨이 위중하게 되매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斷指柱穴) 자신의 피를 아버지의 입에 흘려 넣어드리니 아버지는 병을 털고 소생하게 되였다. 이후 아버지는 건강을 회복하여 7년을 더 사신후 천수를 다하였다.
도명화는 아버지 상을 당하여서도 묘소옆에 여막을 짓고 삼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아버지의 산소옆에서 시묘살이를 할때 깊은산속이라 마실 물이 없어서 곤란을 겪으니 어느날 커다란 호랑이가 나타나 앞발로 땅을 긁어 샘을 솟게 하였다고 한다 . 또한 호랑이가 항상 곁에서 호위하 듯 효자 도명화를 보호하였다고 하니 사람들이 하늘이 내린 효자라고 칭찬이 원근에 자자하였다. 그 후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니 아버지 때와 마찬가지로 삼년간 시묘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그의 효행에 감화를 받아서인지 그의 손자며느리인 옥천전씨(沃川全氏) 또한 효부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시어머니를 지극한 정성으로 모셨으니 항상 집안이 화기애애 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시어머니가 병을 얻어 갑자기 기절하며 숨이 끊어지려고 하자 시할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여(斷指柱穴) 시어머니의 입에 흘려넣으니 소생하여 7년을 더 살았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그 후에 그의 6세손인 도량환이 선조의 지극한 효행을 본받고 선양하기 위하여 청산면 의지리 지동마을에 효자비를 세웠다.
효자비의 전면에는 효자성주도공명화지비(孝子星州都公命華之碑)라고 음기되여 있다.비석의 건립시기는 정묘(丁卯)년 3월로 기록되여있다.
도명화 효자비가 있는 의지리의 지명은 다음과 같다.
의지리라 부르게 된 것은 의동(義洞)과 덕지(德旨)를 합하여 한 마을로 이름 지을 때 의동의 의(義)자와 덕지의 지(旨)자를 한자씩 취하여 의지리가 되었다. 덕지는 옛말로 “덤마루”라 부르고 있는데, 원래는 “덕마루”가 변하여 “덤마루”가 되었다, “덕마루”의 “덕”은 옛말로 “언덕” 또는 “높은 곳”이란 뜻이고 “마루”는 마을이 되므로 언덕에 있는 마을이란 말이다. 그 후 한자로 쓰면서 “덕마루”를 발음대로 덕지로 쓰게 되었다. 의지리의 의동은 중심마을이고 덤마루는 자연마을이다.
의동마을은 남원양씨(南原梁氏)의 집성촌으로 고려말 문하시중 양천룡(梁天龍)의 후손이 이곳에 자리 잡기 이전에는 차씨가 거주하고 있었고 경주설씨(慶州薛氏)가 덕지마을에 임진왜란때 피난 와서 정착하였다. 효행과 열행의 마을로 풍천임씨 열녀문과 효자 도명화의 효자비가 있다.
덕지마을에는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쪽바위에 대한 전설이 있는데, 이 쪽바위를 건드리면 부정을 타 아들을 못 난다고하여 마을사람들은 그 바위 근처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자연지명으로는 개경주, 덕지, 별재(별티재), 의동이 있으며 의동저수지는 1981년 축조 되었으며 덕지에도 저수지가 있다.
덕지리에는 임진왜란때 피난와서 정착한 경주설씨의 집성촌이다.조선시대 참의 벼슬을 지낸 설풍공 후손들이 17대에 걸쳐 세거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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