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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면 지탄리 박동룡충신문(伊院面 池灘里 朴東龍忠臣門)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이원면 지탄리 박동룡충신문(伊院面 池灘里 朴東龍忠臣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11. 28. 07:41





박동룡은 (1607년.선조40년~1636년.인조14년)병자호란때 의병활동을 하였다. 본관은 밀양으로 옥천 지탄리에 거주하였다.

할아버지는 1599년에 효자로 정려된 박인이며 아버지는 유학인 박익성이다.

할아버지 박인은 음사로 종4품 만호벼슬까지 올랐던 인물로서 당시 문과출신으로 부사를 역임한 아버지인 박문수의 나이 80여세가 되어 여생을 보내고 있었으므로 부모를 모시기위해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임진왜란때인 1592년7월 29일 박인의 나이 59세에 갑자기 마을에 들어온 왜적의 칼로 부터 아버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아버지를 감싸다가 아버지와 함께 죽은것이 조정에 알려져 효자정려가 내려졌다.


이런 가풍아래 1607년(선조40)에 태여난 박동룡은 1636년(인조14)의 무과별시병과 340위(501명중에 365등)로 합격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곧바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급제하고 창방(唱榜)하기 전이 였는데도 "내가 이미 출신하였는데 어찌 감히 집에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자원 종군하였다. 



자원종군하여 남한산성으로 왕을 호종하였다가 경기도 광주 험천(險川)전투에 참가하였다.

험천전투는 충청감사인 정세규가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를 구하기 위해 충청도군 8천을 이끌고 남한산성 서쪽 40여리 부근인 험천에 이르는데

청좌익군 제3군소속 정찰기마대 30기에 놀라  청군의 기습공격인줄 알고 후퇴명령을 내리는 바람에 군사들이 절벽투성이인 험천에서 우왕좌왕 하다가 

궤멸되여 버린 전투이다. 



이 당시 박동룡은 공주영장 최진립등과 함께 싸우다 죽었으므로 주부를 추증하고 충신정려가 내려졌다.

지금 이원면 지탄리 포동마을에는 할아버지 박인 효자문과 함께 박동룡 충신무니 남아있으며 [국조인물고]에 송시열이 쓴 박인의 행장에도

박인과 박동룡의 사연이 기록되여 있다.



박동룡의 충신문 편액에는 충신증주부박동룡지문(忠臣贈主簿朴東龍之門)이라고 각자되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