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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면 지탄리 박인효자문(伊院面 池灘里 朴忍孝子門) 본문
이원면 지탄리 포동 마을에 있는 정려문이다.지탄리에 있다는 글을 보고 지탄리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배추밭에서 일하시는 분에게 묻고서야 볼수있었다.지탄리는 금강 변에 위치한 조용한 마을로서, 지탄 마 재배단지가 있다. 포도와 복숭아를 많이 재배하며, 밭농사를 주로 하는 농촌 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가린여울(기탄), 갯골(포동), 못골(지동리), 밤수골(율동리), 삼정골(삼정동), 연봉정 등이 있다. 가린여울은 마을 앞에 흐르는 금강이 두 갈래로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못골은 마을 앞에 못이 있었다. 방수골은 옛날에 밤나무가 울창하였다고 한다. 삼정골은 옛날 정자나무 세 그루가 있었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조금은 을씨년 스러운 빛바랜 적벽돌로 둘러 싸여 있었다 관리하는 이 없으니 더 쓸쓸해 보인다.접근하기도 조금 불편하다.
두개의 편액이 나라히 걸려있다.박인효자문 편액은 오른쪽에 걸려있다.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는 비교적 오래된 편액은 이원면 지탄리에서 태어난 효자 박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노효자박인지문(老孝子朴忍之門)라는 글이 기록되어 있었고 만력기해명정(萬曆己亥命旌.1599년 선조32)에 정려되고 숭정3 정유(崇禎3 丁酉,1777년.정조1년) 에 중건(重建)되였다.
박인(1534.중종29~1592.선조25)은 조선 중기의 효자로서 자는 언용(彦容)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이원면 지탄리 포동마을에서 태여나 성장했다.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낸 이요당(二樂堂) 박흥거(朴興居)의 후손이며 정자(正字) 박감(朴堪)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부사(府使) 박문수(朴文秀)이고 어머니는 충주박씨(忠州朴氏)로서 평시서령(平市署令) 박행(朴行)의 딸이다.부인은 부사(府使) 한기(韓琦)의 딸이다.
박인은 어려서 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절어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혔다 음덕(蔭德)으로 초지만호(草芝萬戶)에 보임되였으나 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해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을 하여 아버지를 정성을 다해 봉양하였다.혹시나 아버지가 드실 거리가 부족한 경우에는 밤중이나 눈보라치는 날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구하였다. 항상 새벽에 문안을 드리고 저녁에 잠자리를 보살폈으며 편안히 취침하게 하고 부모의 이목을 줄겁게 하기 위하여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아버지가 병환으로 위중할때에는 이어가 좋다는 소리에 추운 겨울에 금강에 나가 얼음판을 뚫고 잉어를 잡아 고아드리니 병이 씻은듯이 나았다고 한다.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마을에 왜적들이 몰아닥치자 당시 92세인 아버지를 마을사람들의 도움으로 가마에 모시고 피신하려 하였으나 피신도중 갑자기 만난 왜적이 아버지를 해치려하자 자신의 몸으로 아바지를 감싸 아버지를 보호하려다가 왜적의 손에 아버지와 함께죽고 말았다.당시 그의 나이는 59세였다.
마을사람들이 수풀속에서 가만히 엎드려 그 모든 광경을 목격하고 고을에현감에게 사실을 보고하니 당시 현감(縣監)인 한명윤(韓明胤)이 곧바로 감사에게 아뢰여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리고 또한 그 고장사람인 군자감정(軍資監正) 정곡(鄭谷) 유학(幼學) 조유(趙萸)등도 두번이나 상소를 올렸으나 앞 뒤에서 주선해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오래도록 포상이 내려지지 않았다.
그 후에 그의 아들인 박익성(朴益誠)이 상소하여 마을에 정문을 세웠다.박인의 효자문은 만력기해명정(萬曆己亥命旌. 1599년 선조32)에 정려되고 숭정후3 정유(崇禎後3 丁酉. 1777년 정조1)에 중건되였다.박인(朴忍)은 영동 화암서원(花巖書院)에 배향(配享)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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