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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면 백지리 마을자랑비(伊院面 白池里 마을자랑비)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이원면 백지리 마을자랑비(伊院面 白池里 마을자랑비)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12. 1. 06:25



이원면 백지리 마을입구에 있는 백지리 마을자랑비 입니다.


다리산(月伊山)정기받아 한 생명 태어나니 그를 이름하여 백촌(白村)이라 하였도다.

효성이 극진하여 마을도 효자동(孝子洞)이 되었더라.그는 후에 과거에 급제하여 판서에 올랐으나 세상이 어지러워 바로잡는 표석(標石)되어 굳은 의지 굽히지 않고 장렬히 순절하시니 그를 일러 사육신(死六臣)이라 그 정신 이으려고 유허비(遺墟碑)도 세웠고 성역화 하려 하니 여력이 못미친다.

그 절의(節義)와 충절(忠節)을 길이 살려 자랑스런 후예답게 백지(白池)마을 만들어 보세.



백지리 마을사람들은 사육신의 한사람인  김문기선생에 대하여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백지리는 원래 옥천군 이내면(利內面) 백지리(白池里)와 사단동리(社檀洞里)가 합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1739년 기록에는 이내면 백지리에 55호가 살았고, 1891년의 기록에는 이내면 백지리에 49호, 사단동리에 8호가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007년말에는 86호 174명이 살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전면 조정 때 백자리와 사단동리가 합쳐 백지리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29년 이남면(伊南面)과 이내면(伊內面)을 합하여 이원면으로 개편하면서 백지리도 이에 속하게 되었다.


이곳은 백촌 김문기 선생이 출생하신 곳이다. 마을 유래비에 백촌선생의 효행이 알려져 효자동이라 불리었다는 이야기와 그의 충절을 길이 살려 자랑스런 후예답게 살리라는 결의가 보인다. 김문기 선생은 출생한 마을의 이름인 백촌을 호로 삼았다. 옛 선인들은 출생지나 기거하던 고장의 이름을 호로 사용한 경우가 많다. 사계 선생의 고향은 모리내(沙溪)이고, 중봉 조헌 선생은 중봉산 아래에 인봉 전승업 선생은 인봉산 아래에 사셨던 기록이 있다. 1999년에 원동에서 심천으로 통하는 도로가 개설되고 원동과 백지리 사이에 이원대교가 건설 되었는데 이 다리를 건너 우회전하다 첫번째 골짜기에서 좌회전 하면 흔읍마을인데 울산박씨(蔚山朴氏)가 대대로 이어 살고 있다. 마을 중앙에 마을 유래비가 있고 울산박씨의 선조비인 개성김씨의 효열비가 있다. 마을 앞에 백지 낙시터가 있다.


길을 따라 장동리 쪽으로 가다보면 마을 끝부분 좌측 언덕에 백지도선조합불망비가 서 있다. 강물이 육상 교통로의 큰 장애 요소였던 시절에 도강을 위한 주민들의 노력과 단결력이 보이는 좋은 자료이다. 불망비에서 동북쪽으로 휘어진 골짜기가 분토골인데 여기에 선산곽씨(善山郭氏)의 입향조인 곽유원 선생의 묘소와 재실이 있다.


분토골에는 선산곽씨의 시조공으로부터 9세까지의 선대 단묘를 모시고 있는데 그 묘소가 모두 북한땅 장단에 있기에 단묘를 모시고 제향을 올린다는 슬픈 사연이 기록되어 있다.


길을 따라 작은 고개를 넘어가면 장동리인데 이 고개를 흰고개라 한다. 흰고개 초입에서 우회전하면 오룡골이고 마을길을 따라 내려가다 우측에 채송골이 있는데 정말 양지바르고 아늑한 골짜기 이다 채송골 끝에서 남쪽으로 100여미터 지점에 삭주부사 제주고공 진손유적비(朔州府使濟州高公眞孫遺蹟碑)가 있다.


다시 흰고개에서 장동리 쪽으로 100여 미터 오르다 우회전하면 사당골로 넘어가는 길이 나온다. 이 고개를 넘으면 바로 백촌(白村) 선생의 유허비 앞에 이르게 된다. 2008년 음 6월 8일 추모제 때 그 후손들이 사육신 헌창기념비를 세웠다.


유허비에서 우측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마을앞 오룡소류지에 오룡낙시터가 있다. 유허비에서 좌측으로 100미터 가다가 좌측에 골짜기가 나오는데 이곳이 안골이다. 백읍이라 기록된 마을인데 지금은 폐촌되어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고 흔읍소류지가 있다.[옥천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