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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읍 삼양리 옥천척화비(沃川邑 三陽里 沃川斥和碑) 본문
이 비는 1866년 고종 3년의 병인양요와 1871년 고종 8년의 신미양요를 치른 뒤 흥선대원군이 국민들에게 양인을 배척하고 경고하기 위하여 1871년 4월에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요충지에 세운 많은 척화비 중의 하나이다.높이 135cm, 폭 45cm, 두께 26cm 되는 화강암에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즉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 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라고 큰 글자로 음각하였고 바로 옆에다 「戒我萬年 子孫 丙寅作辛末立」 즉 "우리들의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라고 작은 글자로 새겨져 있다.
이 척화비는 1882년에 고종 19년에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고 우리나라가 서양의 각나라와 교역이 되면서 모두 철거되었는데 이 척화비는 산기슭에 있기 때문에 철거당하지 않고 그대로 6·25 참변때 사람으로 오인받아, 항공기의 기관총사격을 받아서 그때의 탄혼이 몇 군데 남아 있어 파란 많은 한국의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 그 후 1976년 주변을 정화하고 진입로 계단, 철책 등을 보수하여 면모가 일신 되었다.[옥천문화원]
삼양리(三陽里)는 원래 읍내면(邑內面) 가화리(嘉化리)에 속해 있었는데 분구하면서 역리(驛里)가 되었다가, 삼양리라 하여 옥천읍에 속하게 되었다.
1739년 기록에는 읍내면 가화리라 하여 59호가 살았는데, 이 때 가화리는 지금의 삼양리와 금구리(金龜里)를 관할하였다. 1891년의 기록을 보면 역리라 하여, 30호가 살았는데 역리라 한 것은 이 마을에 가화역(嘉化驛)이 있었기 때문이다. 1910년 군남면과 읍내면이 합하여 군내면이라 하고, 이때 삼양리가 되었다. 1917년 옥천면이 되었으며, 1919년 군청사를 삼양리로 옮겼고, 1949년 옥천읍으로 승격되자 삼양리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삼양리라 부르게 된 것은 삼거리(三巨里)의 삼 자와 양지가화(陽地嘉化)의 양 자를 한 자씩 취하여 삼양리라 하였다.
삼거리는 서울, 부산, 부여 방면으로 갈라지는 세갈래 길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고, 양지가화는 가화리를 음지와 양지로 나누어 이곳을 양지바른 곳이라 하여 양지가화라 부르게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교통대, 못뚝거리, 양지가화(조선시대 가화역 자리), 삼거리, 오깔미 등이 있다.
1919년 군청사를 현재의 보건소(옛 옥천읍사무소) 자리로 옮긴 후, 1949년 옥천읍 승격으로 삼양리에는 속속 다른 공공기관들이 들어섰고 174번지에 군청사와 군의회청사가 함께 있다. 또 옥천교육청과 1951년 개교한 옥천중학교, 1979년에 개교한 옥천고등학교가 있고, 농협중앙회 옥천군지부와 보건소, 한전옥천지점, 노인장애인복지관 등이 있으며 국도주변으로 상가가 형성되면서 옥천읍에서도 가장 번화한 거리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옥천-대전간 국도 4호선 군서교옆 돌산(팔각정) 기슭에 마을안녕을 기원하는 마을 고사비가 있으며 매년 정월 대보름에는 마을에 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지낸다.
삼양리에는 삼국시대 삼양리토성이 있다. 삼양리토성은 지금 원형이 크게 훼손되고 관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옥천군의 치소 구실을 하는 중요한 산성으로 추정된다. 이와 함께 서정리와의 경계에 있는 서산성과 삼양검문소 네거리에 있는 삼거리토성 등의 성터가 있다.
2002년 옥천군 농산물집산단지 공사터 문화재 시굴조사 결과 관아를 나타내는 ‘관(官)’자와 ‘사(舍)’자가 새겨진 기와, 6동의 주거지와 함께 마굿간으로 추정되는 6칸 짜리 건물터, 고려시대 가마터가 발견됐다. 이에 따라 이 터는 관아터나 부속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마굿간 터가 발견됨으로써 가화역이 이곳에 있었을 가능성이 비중있게 제기되었다
삼양리 네거리(옛 삼거리)에는 경부선 철도 산기슭에 1871년 4월 고종황제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알리는 척화비가 있다. 또 옥천천주교회는 1945년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2002년 지방성당의 전형적 형태를 띠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현재 충청북도 지역에 남아 있는 1940년대 천주교 성당 건축물 가운데 유일하다 [옥천문화원]
본래 삼성산 하단부 경부선 철로 옆에 세워져 있었다. 이 척화비는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 년(고종 8)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치른 뒤 흥선대원군興宣大 院君이 국민들에게 양인洋人을 배척하고 경고하기 위하 여 1871년 4월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요충지에 세운 많은 척화비 중의 하나이다. 비의 크기는 높이 135㎝, 폭 45㎝, 두께 26㎝이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비의 전면에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이라고 새겨있다. 이 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 를 파는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비의 옆면에는 작은 글씨로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 立(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이라 새겼다. 비교적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다. 1882년(고종 19)에 대원군이 청에 납치되고, 조선이 서양의 각 나라와 교역하면서 척화비는 철거되었다. 그러나 이 척화비는 산기슭에 있기 때문에 철거당하지 않았다. 6·25한국 전쟁 때 사람으로 오인되어 북한 전투기의 기관총 사격을 받았는데, 그때의 총알 흔적이 몇 군데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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