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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읍 수북리 밀양박씨절부비(沃川邑 水北里 密陽朴氏節婦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옥천읍 수북리 밀양박씨절부비(沃川邑 水北里 密陽朴氏節婦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12. 8. 11:00




옥천읍 수북리 화계마을에 있는 1723년(경종3) 세워진 정려이다. 건물양식은 다포형식의 공포와 맞배지붕형태의 목조기와집이다.

건물의 한평으로 건립되였으며 지금은 연일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정윤세의 처 밀양박씨는 영동에서 태여나 동이면 지양리 현동마을로 시집와서 평소 시부모를 극진히 보살피며 살았다.

그러던중 억울한 살인누명을 쓴 남편을 위해 남장을 하고 대신 감옥살이를 하였다. 그 후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살인한 진범이 잡혀 남편도 구하고 자신도 나오게 되였다. 이후 밀양박씨가 20세가 되던해 갑자기 남편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같이 죽기를 결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궁핍한 살림을 청상의 몸으로 이끌어 나가면서 시부모를 지성으로 모셔 사람들로 부터 칭찬이 자자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조정에서 절부로 정려하게 되였다.

편액에는 "절부학생정윤세처밀양박씨지려(節婦學生鄭潤世妻密陽朴氏之閭)라고 씌여있다.또한 절부비가 있어 비각안에 세워놓았다.

비석에는 학생영일정공휘윤세배절부밀양박씨지려(學生迎日鄭公諱潤世配節婦密陽朴氏之閭)라고 각자되여 있습니다.



수북리(水北里)는 원래 군동면(郡東面) 수북리에 속해 있던 마을로, 후에 옥천읍(沃川邑)에 속하게 되어 오늘에 이른다.
1739년의 기록에는 군동면 수북리라 하여 52호가 살았고, 1891년의 기록을 보면 36호가 살았다고 되어 있다.


1910년 군동면이 동면이 되면서 수북리도 이에 속하게 되었다.
1949년 옥천읍이 승격하면서 동이면(東二面) 수북리를 옥천에 이관시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수북리라 부르게 된 것은 금강 갯가의 북쪽에 있다 하여 수북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꾀꼬리(화계리)와 동경재(동정자리, 동정리)가 있으며, 화계(花溪)는 마을 위에 복숭아나무가 많아 봄이면 복숭아꽃이 떨어져 하천 가득히 떠내려간다 하여 “꽃내”라 하다가 화계라 부르게 되었다. 꾀꼬리는 음운변화에 따라 갯곶리>깨꽃리>꾀꼬리로 변화한 것으로 추정한다.


옥천에는 관아의 동쪽에 있는 정자라 하여 동정자(東亭子), 관아의 서쪽에 있는 정자라 하여 서정자(西亭子)가 있었는데, 동정자가 있어 동경재, 또는 동정리, 서정자가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서정리라고 이름 짓게 되었다. 2007년말 현재 화계리에 49호 119명, 동정리에 27호 75명이 살고 있다.


동정자는 옛 옥천상수도 취수장이 있던 금강이 휘도는 언덕에 위치해 주변 경관이 뛰어난 곳에 위치해 있으며 그 터에서 주춧돌로 보이는 돌과 정자를 쌓을 때 축성했던 흔적 등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강릉판관과 선천부사를 지낸 유경 공이 명종 대인 1550년대께 동정자를 건립한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의 동정리는 대청호 수몰로 인해 수몰선 위에 다시 마을을 형성하면서 생긴 곳이다. 현재의 동정리에 선돌 1기가 대청호변 산기슭에 있다. 애초 있었던 자리에서 옮겨진 것이지만 군동초등학교 앞 100m 지점 동이면 남곡리에도 선돌이 있다. 이 두 개의 선돌은 석탄리 안터의 선돌과 달리 각각 60개, 45개의 줄이 그어져 있어 연구대상으로 꼽히고 있다.
1963년 개교한 군동초등학교는 1998년 학생이 없어 폐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