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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면 백지리 김문기현창기념비(伊院面 白池里 金文起顯彰紀念碑)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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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면 백지리 김문기현창기념비(伊院面 白池里 金文起顯彰紀念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12. 7. 08:08

 

 

이원면 백지리 김문기유허비옆에 자리하고 있는 김문기 기념비입니다.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로 부터 김문기선생이 사육신으로 논의 결과 1982년 사육신으로 판정된 결의문을 기념하는 기념비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충의공김문기선생사육신현창기념비(忠毅公金文起先生死六臣顯彰紀念碑)리고 적혀있습니다.

 

 

 

사육신()이란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고, 왕이 되자 이에 불복하고 단종 복위에 힘을 쓰다 목숨을 잃은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과 1982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현창된 김문기를 부르는 말이다.

1453년(조선 단종 1년)부터 1456년(세조 2년)에 걸쳐 수양대군(=세조)이 단종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르면서 절개있는 신하들에게 화를 입힌 사건을 계유사화, 병자사화(, )라고 말한다.

문종의 외아들로 태어난 단종은 8세 때에 왕세손()에 책봉되고 문종이 승하하자 1452년 12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그러자 숙부인 수양대군은 왕위찬탈의 야심을 품고 김종서(), 황보인() 등의 중신들을 살해하는 한편, 친동생인 안평대군() 마저 사약을 내려 죽이고 전권을 장악하여 재위 2년만에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게 되었다.

결국 수양대군은 조선의 일곱 번째 임금 세조가 되었다.

이에 분개를 느끼고 '하나의 태양 아래서 두명의 왕을 섬길수 없다'는 절의파인 집현전 학자들에 의해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났다. 세조는 이를 사전에 알고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등 사육신을 참형하고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켜 강원도 강원도 영월로 귀양을 보낸 후 뒤에 17살의 조카에게 사약을 내려 죽게 하였다.

1977년에 김문기가 사육신에 해당한다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어 논의 하에 국사편찬위원회 의견을 참고하여 1982년 기존 사육신에 김문기 선생을 추가로 사육신에 현창하였다.
사육신 [死六臣]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김문기(1399-1456)는 본관 김녕(). 자 여공(). 호 백촌(). 초명 효기(). 시호 충의(). 1426년(세종 8) 식년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하였다. 1430년 에문관검열()·정언()·함길도관찰사를 역임하고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1456년 성삼문()·박팽년() 등이 주동한 단종복위()의 모의에 가담하였다. 모의가 발각되자 고문에 굴복하지 않다가 이개()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영조 때 9대손 정구()의 송원()으로 복관되었으며,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의 섬계서원()에 배향되었다. 1981년 서울시와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하고, 그의 가묘를 서울시 노량진 사육신묘역에 설치했다.

1977년에 김문기가 사육신에 해당한다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자 서울시, 문교부, 문화공보부, 국사편찬위원회 등이 심도있는 연구와 논의를 하였다. 그 결과 서울시에서는 국사편찬위원회의 합의사항을 참조하여, '유응부의 사육신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김문기 선생을 사육신과 같은 충신으로 현창'하는 것으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
.

 

 

 

 

 

헌창기념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행하여야 한다. 잘못된 야사野史 에 의하여 가리워졌던 우리 민족의 위대한 역사적 진실을 사실대로 밝힘은 정의의 실현이다. 우리 민족의 장래는 영 원무궁하다. 그러므로 영원무궁한 민족의 진실된 역사교 육을 위하여는 5백 년이 아니라 그 보다 더 오래된 세월 동 안 야사로 인하여 와전誤傳된 사실이라도 진실을 밝히는 것 이 사학적 정의의 실현이고 양심적인 사학자의 임무이다. 정사正史인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백촌 김문기 선생은 역 사상 가장 위대한 충절이라는 사육신 중에도 그 영도적 위 상이다. 그럼에도 풍문만으로 엮은 야사로 인하여 위대한 그 충절이 5백 년 간 묻혔다가 근년에 왕조실록이 공개됨 으로서 비로소 역사적 진실이 밝혀진 정의로운 경위를 여 기에 적는다. 세조는 계유정변 때 그가 죽인 허후가 살았 더라면 六신이 아니라 七신이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사육신 개념은 일찍이 세조 때부터 가려졌었던 것이다. 그 래서 세조실록에는 이를 반영하여 모의가 발각된 첫날인 세조실록 2년 6월 2일 경자일조에도 여러분을 국문하였으 되 성삼문, 하위지, 이개, 박팽년 그리고 김문기 선생에 대한 국문 경위 및 결과와 유성원 선 생이 자살한 사실만을 기록하였고, 일주일 간 고문한 후인 동년 2년 6월 8일 병오일조에도 여 러분을 사형하였으되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김문기 선생의 위 六신에 대해서 만 그동안의 활동상을 특별히 설명해 주었고, 그 중 특히 김문기 선생이 박팽년, 성삼문 두 분 에게 거사 임무 분담을 정하여 주고 스스로는 가장 중요한 군 동원을 맡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 다. 그리고 위 실록 세조 2년 6월 초9일 정미일조에는 사면령 교서에 성승, 유응부, 박쟁 등 장신將臣은 김문기 선생을 포함한 六신들의 우익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세조실록에는 세조 때 가려진 六신은 위 병오조의 김문기 선생을 포함한 육신임을 전하였다. 당시 3세였던 남효온이 30년 후에 풍문을 적은 육신전에는 유응부 장군이 六신으로 끝내 불복하였고 함길 도절제사를 한 재상이라고 기술하였다. 이는 사육신 중에 함길도절제사를 지낸 재상으로 끝내 불복한 분이 있음을 뜻한다. 그런 분은 왕조실록에 의하면 단종복위를 모의한 분 중에는 김문 기 선생이 유일한 분이다. 그리고 육신전에는 유응부 장군이 단종의 복위를 빙자하여 사직을 도모했다는 자백을 강요받았다고 쓰였다. 그러나 세조는 그러한 자백을 영도자 격이고 그런 능력이 있는 분한테 받아내려 한 것이니 김문기 선생은 직위도 제일 높은 판서 겸 삼군도진무 로 군 동원을 맡았었으니 세조로서는 김문기 선생에게 그런 자백을 강요한 것이다. 그러나 김 충의공김문기선생사육신 현창기념비 2편2장Q-유형문화유산(1117)_5차_1안 -236-463 14. 12. 24 오후 4:03 페이지 401 제2편 역 사 와 전 통 402 문기 선생은 사상 유례없는 고문에 굴복치 않고 이 자백의 강요에 불복하였고, 동지들이 꾀 없 이 모의한 동지를 불고 심지어 상왕까지 부는 것을 보고 이들과 모의한 것을 후회하고 더 물을 것이 있으면 저들에게 물어보라고 끝내 입을 다물고 불복한 것이다. 그래서 실록에 김문기 선 생만이 불복하였다고 기록된 것이다. 이와 같이 육신전에 잘못 전한 소문을 적었으나 정사인 왕조실록은 임금도 보지 못한 지난 5백년 동안 잘못된 육신전만을 읽고 믿어옴으로서 사육신 중에도 가장 열이요, 영도자 격인 김문기 선생의 충절이 구름 속에 묻혔던 일은 참으로 분통 스러운 일이다. 그러던 중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문교부에서 조선왕조실록 영인본을 간행하기 에 이르렀고, 서기 1973년 김문기 선생의 19세손 김진우보가 세조실록 2년 6월 경자조, 병오 조, 정미조와 정조 14년 2월 경오조의 실록과 육신전의 대조 분석에서 김문기 선생이 그 중에 서도 영도자임을 알아내어 77보에 백촌 선생 사육신론을 게재하였다. 1977년 7월 말 조선일 보에 사육신이 바뀌었다고 글을 쓴 구석봉 씨로부터 서울시가 지방에 묘가 있는 육신도 육신 묘역에 가묘를 봉안한다는 소식을 듣고 1977년 8월 초 김문기 선생 봉안추진위원회가 조직되 어 위원장 허명 씨 명의로 서울시에 진정을 한 바, 시에서는 사육신이 아니면 누구도 사육신 묘역에 가묘를 봉안할 수 없다는 원칙을 밝힘으로서 김문기 선생이 사육신인 여부를 문교부에 조회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문교부에서 국사편찬위원회에 심의를 명함으로서 동 위원회에 서는 수차 회의를 열고 위원인 이병도, 백낙준, 이선근, 김철준, 김원룡, 한우근, 최영희, 신석 호, 유홍렬, 조기준, 전해종, 고병익, 김도연 제위諸位가 “조선왕조실록 등을 면밀히 검토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면밀히 토의한 후 1977년 9월 22일에 조선왕조실록 세조2년 6월 병오조 에 특별히 활동상이 기록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및 김문기가 세조 때 가려 진 육신임을 판정한다”고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그해 12월 2일 다시 김문기 선생의 가묘를 육 신 묘역에 봉안하고 기왕에 있었던 유응부 장군의 묘는 존치하기로 결의함으로서 사육신공원 의절사에 김문기 선생의 위패와 1978년 5월 18일 사육신 묘역에 가묘를 봉안하였다. 영월 단 종역사관에도 2008년 1월 15일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아! 이로서 5백년간 구름에 가렸 던 백촌 김문기 선생의 고귀한 충절이 푸른 하늘에 태양같이 빛을 보게 되었다. 만시지탄晩時之 歎77) 은 있으나 이 어찌 민족적 경사가 이니리오. 양심적인 사학계의 정의의 실현이라 하리로 다. 이를 경모하여 삼가 여기 명하노니 단기의 강산에는 충효의 일월도 높았어라. 백촌 선생 의 절의 속에 육신청사六臣靑史 조명하니 그 단심丹心은 해님 같고 벽혈碧血78) 은 달빛이라. 여기 에 한겨례의 큰 역사에는 강상綱常의 광명이 밤낮없이 영원유장 하리! 2008년 3월 일 대한민국민족정기선양위원장 전 성균관장 최창규 삼가 짓고, 세계문화예술발전중심회장 안 성후당 초당 이무호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