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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면 한곡리 유인당(靑山面 閑谷里 有仁堂) 본문
청산면 한곡리 문바위에 있는 태안박씨의 재실인 유인당(有仁堂)입니다.
유인당 대문에는 태안박씨청암종친회(泰安朴氏靑岩宗親會)라는 간판을 걸고있다.
한곡리(閑谷里)는 청산현 현내면 장위리에 속해 있던 마을로서, 후에 장위리에서 한곡리로 분구되어 오늘에 이른다.
1739년이나 1891년의 기록에 청산현 현내면 장위리라 하여 129호가 거주하였던 것으로 되어 있다. 2007년말 현재 45호 95명이 살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일제조정 때 청산군이 없어지면서 옥천군에 소속되고 현내면과 동면 등이 합하여 청산면이 되었고 장위리가 장위와 한곡으로 나뉘었다.
한곡리라 부르게 된 것은 이곳 마을이 옛이름으로 “한골”과 "문바위“로 불리고 있는데 한자를 쓰면서 ”한골“을 발음대로 한곡(閑谷)이라 썼으나, 이 한골의 원뜻은 옛글로 ”한“은 크다는 뜻으로 "골이 크고 넓다”는 말이 되므로, 뜻대로 한다면 대곡(大谷)이 될 것이다. 한곡이라 한 것은 ‘한가하고 조용한 골짜기’ 또는 “한밭(大田)”에서 나온 말이라고도 한다.
문바위는 마을뒤에 큰 바위들이 여러 개가 서로 기대어 서있어 마치 문과 같이 생긴 바위라 하여 문바위라 부른다. 문바위(門岩)에서 300m 동남쪽 산비탈(장군봉)엔 장수발자국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이 남아 내려오는 곳이기도 하다. 하늘나라 재상의 아들 웅인이 금기를 어기고 마을사람을 괴롭히는 괴물을 죽이려고 무술을 썼다가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웅인을 사랑했던 옥황상제의 딸 계화도 내려와 함께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산을 오르다 보면 비스듬히 경사진 곳에 사람모양의 바위 두개와 웅인이 괴물과 싸울 때 생긴 발자국 모양이 새겨진 바위가 놓여 있다.
1893년 4월 동학교도 수천 명이 교주인 최시형과 집회를 하다가 관군에게 쫓겨 보은(보은 장안- 후에 4. 2 보은집회)으로 갔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새서울 : 사람들이 들끓어 새로운 서울). 문바위에 주동자인 박희근 등 7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피난 온 최시형은 아는 것이 많고 잘생긴 김낙현(안산김씨)의 집에 기거하며 김낙현과 시국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마을에 거주하던 동학도들이 보은으로 퇴각 후 관군이 마을에 들어와 불을 지르고 동학군을 고발시 현상금을 내걸어 한골로 피난해 있던 김낙현은 1898년 4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고 구전되고 있다고 한다. 문바위 뒷산에 묘가 하나 있는데 최시형의 묘라고 하여 얼마 전까지 마을에서 사초와 벌초를 했는데 최시형의 묘인지는 확실하지 않고 아마 최시형교주의 아들인 최봉주의 묘일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자연마을로는 한골과 문바위 두개의 마을로 되어있으며 한곡저수지는 1987년 축조되었다.
태안 박씨(泰安朴氏)의 시조 원의(元義)는 신라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세자(世子)인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彦枕)의 13세손으로, ‘태안박씨족보(泰安朴氏族譜)’에 의하면 그는 고려 때 삼사좌윤(三司左尹)을 지낸 을재(乙材)의 현손(玄孫)으로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올라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하고 나라에 공을 세워 태안부원군(泰安府院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원의(元義)를 일세조(一世祖)로 받들고 밀양 박씨(密陽朴氏)에서 분적(分籍)하여 태안(泰安)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원의(元義)는 여덟 형제 중 여섯째인데, 슬하에 아들이 없어 형(白兄)인 세흥군(世興君) 원효(元孝ㆍ좌정승을 지냄)의 넷째 아들 희문(喜文)을 사자(嗣子)로 맞아 대(代)을 잇게 하였다. 희문(喜文)은 고려조에서 좌정승(左政丞)을 지내고 태원부원군(泰原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보규(甫圭)가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했고, 보규(甫圭)의 아들 학(謔)은 신호위 보승중랑장(神虎衛保勝中郞將)을, 손자 유(蓅)는 신호위 상장군(神虎衛上將軍)을 지내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상호군(上護軍) 인추(仁抽)의 아들 문거(文巨)가 뛰어나 순성부원군(蓴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비(悲)가 가문을 중흥시켰다. 송경(松京) 출신으로 고려 말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비(悲)는 고흥감무(高興監務) 겸 권농병마단련판관(勸農兵馬團鍊判官)을 지내고 고려가 망하자 처자(妻子)를 데리고 충청도 청산현 동면 대동리(靑山縣東面大同里)에 은거했으며, 조선조에서 신창(新昌)ㆍ예산현감(禮山縣監)에 임명하고 그를 불렀으나 끝내 거절하고 절의를 지켰다.
태안 박씨들은 대대로 개성에 살다가 비(斐) 때에 충청도 청산현(靑山縣)에 은거하게 되었는데, 조선조에서 통례원 봉례(通禮院奉禮)를 지낸 그의 아들 상덕(尙德)이 진주 정씨(晉州鄭氏)와 혼인하면서부터 진주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 후 상덕(尙德)은 둘째아들 자주(自胄)에게 ‘너는 청산(靑山)으로 가서 선영을 받들라’ 하여 자주(自胄)는 청산(靑山)에 남게 되었다. 이 때부터 후손이 진주(晉州)와 청산(靑山)에 분거하여 진주파(晉州派)ㆍ청산파(靑山派)로 갈라졌고, 자주(自胄)의 둘째아들 일종(一宗)이 정읍(井邑)으로 이거하여 다시 정읍파(井邑派)를 이루어 3파로 나뉘어졌다.
[출처] 태안 박씨(泰安朴氏)의 연원|작성자 베이비 베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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