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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면 백운리 백운리고가(靑山面 白雲里 白雲里古家)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청산면 백운리 백운리고가(靑山面 白雲里 白雲里古家)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12. 14. 06:14

 

 

청산면 백운리에 있는 백운리고가입니다. 대문에는 청산밀성박씨종회소(靑山密城朴氏宗會所)란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옥천 백운리 고가는 망와의 기록으로 보아 1842년(道光22年 癸卯 日)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건립 당시 종2품의 정참판이 기거했다하여 참판집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전면에는 一字形의 사랑채가 배치되고 후면에 一자형의 안채가 배치되어 있다. 사랑채는 솟을삼문에 면한 막돌담장으로 둘러싸고 안채는 사주문에 면해서 담장으로 둘러싸고 있다. 하천을 따라 형성된 마을길에 면하여 행랑채 자리로 보이는 터가 마련되어 있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5칸의 목조기와집이다. 평면구성은 왼쪽부터 대청, 윗사랑방, 아랫사랑방, 부엌, 건넌방으로 구성되고, 대청에서 아랫사랑방까지 전퇴를 마련하고 있다. 건물구조는 화강석 기단 위에 덤벙 주초를 놓고 방주(方柱)를 세운 납도리이다. 가구형식은 오량가(五樑家)이다. 대청의 천정은 연등천장이며 방은 반자를 하였고, 마루는 자귀질하여 만든 우물마루로 고식이 잘 드러나고 있다.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툇마루 청판은 오래된 고식기법으로 조선시대의 치목기법(治木技法)이 역력히 나타나 있고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아울러, 건축 가구법이 축조 당시의 목조기술을 파악할 수 있어 건축 연구자료로서 보존할 가치가 있다.

 

 

 

 

 

백운리(白雲里)는 원래 청산현 현내면(縣內面) 백운동리에 속하였던 마을로서 후에 백운리라 이름을 고쳐 현재에 이른다.


1739년 여지도서에 보면 현내면 백운동리라 하여 83호가 1891년 신묘장적에는 103호가 살았던 기록이 남아있다. 그 후 1914년 군면 통폐합에 따라 현내면이 청산면으로 되면서 옥천군에 소속하게 되었고 이때 백운리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백운리라 이름 짓게 된 것은 1460년경 조선 세조 때 청산현감이 이 마을의 경치가 좋아 동헌 위쪽에다 정자를 짓고 당대의 문장가이며 영중추부사를 지낸 김수온선생에게 정자 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던바 “청산에는 백운이 없는 데가 없고 백운이 있는 데는 청산이 없는 데가 없다. 그리고 옛사람의 시에 청산은 백운밖에 푸르며 백운은 청산 속에 희고 희다라 하였으니 백운정이라 함이 좋겠다.”하여 백운정이라 이름 지었고 마을이름도 백운리라 하였다.


백운리의 절경은 백운리 뒷산인 덕의산에 수백 마리의 백학(白鶴)이 무리를 지어 석양빛을 받으며 내려앉는 장관을 백운귀학(白雲歸鶴)이라 하여 청산팔경 중 제2경으로 노래한 옛 사람들의 정취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백이는 고씨, 박씨, 이씨가 마을을 형성했기에 고박이로 했다가 변천하여 고백이가 되었고, 중골은 백운리와 교평리 중간에 있어서 중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배맨바위(백골재)는 마을 위 덕의산 중턱에 위치하고 옛날 대홍수에 온 천지가 물에 잠겼을 때 배를 맸다하여 배맨바위가 되었다고 하며 한뎃마당은 마을중앙에 위치하여 널따란 광장을 이루고 있어 한뎃마당이라 부르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있어 식수 및 빨래터로 이용하여 왔다고 한다. 고백이고개(만월령)는 마을뒤 만월리와 백운리를 연결하는 고개로 옛날에는 주요교통로였다.


백운리에는 1946년 7월 31일 개교한 청산중학교와 1955년 6월 1일 개교한 청산고등학교가 있다. 청산여자중학교와 청산여자고등학교는 1978년 3월 1일 개교하였으며 1985년과 1986년에 청산중학교와 청산고등학교에 통합되었다.백운리는 일평생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유정 조동호선생의 출생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