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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한면 차정리 교서각(水汗面 車井里 敎書閣)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보은군(報恩郡)

수한면 차정리 교서각(水汗面 車井里 敎書閣)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7. 1. 24. 06:24



수한면 차정리 후율사내에 자리하고 있는 교서각입니다.


1839년(헌종 5)에 세운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전면 225cm, 옆면 200cm의 목조와가로 다포식초익공 홀처마 팔작지붕집인 교서각이 있고,

비각안에는 교서비가 있는데 조헌이 청주승첩을 장계한데 대하여 1592년 8월 15일 선조가 내린 유서로 후율사교서비(後栗祠敎書碑) 선묘조교유서비명(宣廟朝敎諭書碑銘)이라고 전서(篆書)로 되어 있고 내용이 음각되어 있다. 매년 음력 3월과 9월 중정(中丁)에 조헌의 손(孫)과 군내 유림들이 제향을 올린다.



宣廟朝敎諭書碑銘

忠淸道義兵將奉常寺正 趙憲 敎書

 

王若曰雄予明不能察物而知言進言者或有言國家危亡之至迫在朝夕雖是其言而實不悟取大夏者人心之渙散而徒以盜賊外侮爲慮以爲城池之高濬甲兵之屛利足以衛民而安邦殫民力而圖之豈意城池甲兵勤若而成之者悉以資賊而獨歸予致令廟社邱墟生靈魚肉而莫之能禦咎專在予雖今日千百辛酸而受以爲罪不敢言若予情戚矣尙賴天地相宗之靈人心思漢民不棄予諸路忠義紏率徒衆在在討賊而爾名赤在其中雖不見俘穫獻功之書而予其嘉之己授爾奉常寺僉正爾其悉否頃者湖南儒生粱山壔自義兵將金千鎰所來栓其歸也憑付一書而去矣其己傳到否此側泛論湖中士民而非專諭栓爾者然其書所云云側爾必與衆父老傳若予之若意客己盡之爾庶幾許予改過勉勵忠奮惟恢復奮物是務通來久不聞湖中消息予用心悶玆憑崔遠軍中申諭爾並令探視本道賊勢本道之賊留剳幾許處而象約幾何其氣裏旺比前日爲何督捕倡義如爾憲者又誰而所斬穫多小如何右道郡縣其猶安堵如舊否頃者遼東總兵官祖承訓耀兵回還之後天朝又欽差兵部侍郞一員督率廣寧遼東等地方都副總兵等官撥兵馬七千餘萬幷調運粮支水陸幷進令至王城蕩掃本月十一日游擊將軍張奇功領先鋒一千渡江十五日江浙游擊將軍沈惟敬連炮手一千六百名渡江方謀進討秋晴路乾政屬擒胡之月馬肥弓勁實是殺賊之期天兵垂至百神景從鐵馬亘於大定淸川舸艦聯於山東江浙狂冠惡積天誅當加我國義兵京畿黃海道者亦多相繼斬賊泰捷万絶人小思奮載順殺氣此實宗枋再造之會爾憲更勵精忠益進無怠仁以附衆義以鼓勇相機以進收勝萬全不其偉歟本道大小戰亡張智賢等以下乃至挺身討賊如僧處一鄭億萬之軰悉今巳加恩賞爾可敦諭予意多設奇策或尾擊或夜斫使隻輪不還一路先淸而來協南軍進視都城園陵松栢及其末援逃竄老弱及其未死則今日元功非爾而誰爵賞在予山河可指播越已久尅復末涯高秋霜露悶宗杜之飄零絶寒江湫寄帳殿之蕭瑟懷土無關於貴賊思歸日功於中心翹待爾等來迎采輿予言欲窮予淚先下爾宣自豐至可恒也於戱廟當愧無策事有待於踈蹤坂蕩識誠臣功可效於今日故玆敎示想宣知悉

 

萬曆二十年八月十五日




선묘조교유서비명(宣廟朝敎諭書碑銘)

충청도(忠淸道) 의병장(義兵將) 봉상시정(奉常寺正) 조헌(趙憲)에게 내리는 교서(敎書)

 

왕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밝히 사물을 살펴 남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줄 몰라서 진언(進言)하는 자가 혹시 국가가 위태로워 망하게 되는 것이 바로 눈앞에 닥쳐왔다고 말하였더라도 그것을 진실로 깨닫지 못하였다. 나의 큰 잘못은 인심(人心)이 흩어지는 것에 있었는데, 단지 도적이 바깥에서 쳐들어오는 것만을 근심하였다. 성만 높이 쌓고 못만 깊이 파며 갑옷으로 두르고 병기을 날카롭게만 하면 백성들을 보호하고 나라를 평안히 하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백성의 힘을 다하여 그것을 도모하였다. 그런데 애써 만든 성과 못, 갑옷과 병기들이 모두 다 적을 돕는 도구가 되어 나에게 되돌아올 줄을 어찌 꿈에나 꾸었을까. 이것은 모두 내 탓이다. 종묘(宗廟)와 사직(社稷), 구허(丘墟)의 생령(生靈)들에게 어육(魚肉)을 바쳤는데도 누구도 막을 수 없었으니, 허물이 모두 다 나에게 있는 것이다. 비록 오늘날 쓰라린 고통을 받더라도 이는 나의 죄로 감수해야 하는 것이니 감히 말할 것이 못된다. 나의 마음이 슬프구나. 아직까지도 천지(天地)의 영(靈)이 종묘(宗廟)를 돕는 것에 의지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오랑캐를 싫어하고 백성들이 나를 저버리지 않아서 전국에 충의(忠義)가 있는 자들이 무리들을 이끌고 곳곳에서 왜적을 토벌하니 너의 이름도 그 가운데에 끼어 있구나. 비록 적을 섬멸하고 공을 세웠다는 상서는 보지 못했지만 나는 그것을 가상히 여기어서 너에게 이미 봉상시 첨정(奉常寺 僉正)을 제수하였는데, 너는 그것을 다 아는가. 지난번 호남유생(湖南儒生) 양산도(粱山壔)가 의병장(義兵將) 김천일(金千鎰)로부터 왔으므로 그가 돌아갈 적에 그에게 편지를 보냈으니 이미 전달되었는가. 이곳에서는 호중 사민(湖中 士民)이라고 범칭 하므로 그것은 오로지 너에게만 전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편지에서 이야기 한 것은 네 곁에 있는 여러 부노(父老)에게 나의 이러한 뜻을 전하여 내 뜻이 다 수용되도록 바란다. 너는 내가 허물을 고치고 충성으로 분기하는 이를 힘써 격려하기를 바라였느니 오직 옛날대로 회복하기를 힘쓸 것이다. 근래에 오랫동안 호중의 소식을 듣지 못하였으니 내 마음이 걱정스럽다. 이에 최원(崔遠)의 군중(軍中)에 내린 신유(申諭)에 의거하여 너도 이와 마찬가지로 본도(本道)에서의 왜적의 정세, 즉 본도의 왜적이 어느 곳에 주둔해 있는지, 상황은 어떠한지 사기는 전일에 비해 어떠한지, 너와 같이 의병을 일으킨 자들이 또 누구인지, 어느 정도의 적을 무찔렀는지, 이 도의 군현민들이 안도하는 것이 옛날과 같은 지를 탐문하도록 하라. 지난번에 요동(遼東) 총병관(總兵官)이 훈요(訓耀)를 받들어 병(兵)을 되돌려 돌아간 뒤에 천조(天朝)가 또 병부시랑(兵部侍郞)을 파견하여 광녕(廣寧) 요동(遼東) 등 지방도부총병(地方都副總兵) 등을 이끌고 병마(兵馬) 7천여만을 파견하여서 이들에게 군량미를 대느라 수륙(水陸)의 물자를 모두 내어놓아서 왕성(王城)이 모두 싹 탕진하는데 이르렀다. 본월 11일에 유격장군(游擊將軍) 장기공(張奇功)이 선봉(先鋒) 1천을 이끌고 강을 건넜고 15일에는 강절유격장군(江浙游擊將軍) 심유경(沈惟敬)이 포수(炮手) 1천 6백명을 이끌고 강을 건넜다. 이제 막 나아가 토벌할 것을 꾀하려는데 가을 날씨가 맑고 길은 말랐다. 시기가 오랑캐를 사로잡을 때에 이르렀으니 말이 살지고 활이 굳세다. 이는 실로 왜적을 죽일 절호의 기회이다. 천병(天兵)이 이르러 온갖 신들이 따라 도와서 철마가 청천을 크게 정벌하기에 이르렀으며 배가 산동과 강절(江浙)로부터 이르러 오니 미쳐 날뛰는 악한 무리들에게 하늘이 벌을 내려야 한다. 이때 우리나라의 의병들이 경기도와 황해도에도 서로 이어 나타났으며 적을 크게 무찔러 이겼다. 사람들은 모두 없어져 적지만, 떨쳐 일어날 것을 생각하고 거듭 숙살하는 하늘의 기운을 따르니 이것은 실로 나라를 다시 만들 기회이다. 너 헌은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더 충성을 다하여 게으름이 없이 하여 인(仁)으로 무리들을 모으고 의(義)로 그 용맹을 북돋아서 서로 이어 나아가서 온 백성들을 거두어 나갈 수 있다면, 어찌 위대하지 않을 것인가. 본도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죽은 장지현(張智賢) 등 이하는 곧 앞으로 나서서 왜적을 토벌하였고 승(僧) 처일(處一)과 정억만(鄭億萬) 같은 무리들에게도 모두 지금 이미 은혜로운 상을 내렸다. 너에게 내 뜻을 돈독히 알리노니, 많은 기책(奇策)을 세워서 혹은 뒤따르며 공격하기도 하고 혹은 밤에 기습하기도 하여 외 발 바퀴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온 도를 먼저 깨끗이 씻어내어 와서 남쪽 군대를 위협하여 도성(都城)에 있는 원릉(園陵)의 송백(松柏)을 나아와서 살펴보고 그 끝에서 도망하고 숨은 노약자와 아직 죽지 못한 자들을 지원한다면 오늘날의 원래 공훈에 대하여 네가 아니라면 그 누구에게 상을 주겠는가. 나의 산하(山河)에서 도성(都城)을 떠나 피난 해 온지 오래된 뒤에야 말애(末涯)를 회복해 나갈 수 있었다. 하늘 높은 가을의 상로(霜露)를 보니 종묘와 사직이 표풍에 떨어질까 걱정이다. 차가운 강에 물이 불어 길이 막혔으니, 소슬한 장막에 의거해 있으면서 돌아갈 날을 생각하니 마음에 더욱 절실하다. 너희들이 나의 가마를 맞이하러 올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말이 채 다 하기도 전에 눈물이 먼저 떨어진다. 너는 마땅히 내 말을 헤아릴 것이다. 오호라 종묘에 대해서는 부끄럽게도 대책이 없고 일은 종잡을 수 없는 곳에서 기다리니 신하의 공이 오늘날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겠구나. 짐짓 이에 교시하니 마땅히 잘 알아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력(萬曆) 20년(1592년) 8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