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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수읍 비중리 박선이,이춘금충의비(內秀邑 飛中里 朴善伊,李春金忠義碑) 본문

통합청주시/청원구(淸原區)

내수읍 비중리 박선이,이춘금충의비(內秀邑 飛中里 朴善伊,李春金忠義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7. 2. 17. 15:03



노비들의 비석을 세워주는 경우가 참 드문데 청원구 내수읍 안정나씨의 사당인 홍양사경내에 특이한 비석이 있다.

주인인 나사종이 전사하여 적에 의하여 시신이 훼손되자 주인의 시신을 안고 저항하다 같이 죽임을 당한 관기 박선이와 아복인 이춘금의 넋을 기리는 충의비이다. 비석은 삼세충효문 옆에 있으며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가 쉽다.




성종(成宗)22년(辛亥年,1491년)에 여진족이 5천의 대군으로 조산성(造山城)을 함락하고 경흥땅을 노략질 하자 나사종은 장졸들과 함께 적군을 무찌르는 혁혁한 전공을 세우다 32세의 젊은나이로 순절을 하였다.


이 때 관기(官妓) 박선이와 아복(衙僕) 이춘금이 공의 흩어진 사지를 안고 울다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를 보고 경흥부민(慶興府民)들이 그 충절을 기린 내용을 새긴 비이다. 현재 홍양사(鴻陽祠)안에 있으며 안정나씨 가문에서 관리하고 있다.


비석의 전면에는 박선이.이춘금충의비(朴善伊.李春金忠義碑)라고 적혀 있으며

뒷면에는 只知有主 主殉幷殉 不知有身 烈哉兩人 라고 적혀있다.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오로지 주인만을 알고 주인이 죽으니 따라죽었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으니 열렬한 마음의 두 사람이로다.




나사종(羅嗣宗)은 조선 전기의 충신이다.
조선 성종 때 여진족의 침입을 막다 전사하여 충신으로 추앙된 인물이다.
본관은 안정(安定)이며, 자는 광원(光遠), 호는 퇴수헌(退修軒)이다. 시조(始祖)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나천서(羅天瑞)의 6세손이며 나유선(羅裕善)의 셋째 아들로 청주 출신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학행과 무술이 뛰어났으며, 특히 궁마에 능하고 의협심이 강하여 그릇된 일을 보면 참지 못하는 장부의 기개가 있었다. 청년기에 문무에 힘써 닦은 그는 충청도관찰사 성준(成俊)의 천거로 발탁되어 1486년(성종 17) 경흥부사(慶興府使)가 되었다.

여진족들이 자주 변경에 침구하여 약탈을 하므로 나사종(羅嗣宗)은 임지에 부임하여 군사를 조련하고 조산보(造山堡)를 개축하게 하여 임전태세를 갖추는 한편, 목민들을 잘 다스렸다. 1491년 1월 여진족 올적합(兀狄哈)의 무리가 조산보에 침입하였다.

부사는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결전을 벌였는데 전세가 불리하고 또 화살이 다하여 전사하였다. 그 후 숙종 때 병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고, 시호를 충정(忠貞)이라 하였으며 충신문을 건립하였다.


그의 아들 나운걸(羅云傑)[1456~1495]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못함을 한탄하여 3년상이 끝나기도 전에 허종(許琮)의 여진 정벌에 백의종군하고 올적합을 죽이지 못함에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다고 삼년상이 끝나는 날 자결하였다.

나운걸의 아들 나빈, 나린(羅潾)[1475~1495] 형제 또한 효성이 깊어 수차 여진 정벌에 종군을 자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3년상이 끝나는 날 피를 토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삼세가 같은 날에 기일이 되는 충효를 남겼다.

충청북도 청원군 내수읍 비중리에는 숙종 때 세워진 삼세충효정문(三世忠孝旌門)이 충청북도 기념물 제40호로 지정되었다.

충청북도 청원군 현도면 매봉리 산 42에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