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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원면 문주리오층석탑(大召院面 文周里五層石塔) 본문
문주리 석불좌상앞에 짝잃고 외롭게 세월을 깁고있는 문주리오층석탑.
오층석탑의 모습속에서 외로움이 물씬 풍기는 듯 하다.
문주리 오층석탑은 충청북도 충주시 대소원면 문주리 문주리 사지에 있던 고려 전기 석탑이다.
문주리 사지는 고려시대 건립된 석탑과 석불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법은사(法恩寺)라는 작은 절이 세워져 있다. 석탑과 석불 주변에서 다량의 기와편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창건시 전각(殿閣)이 건립되어 사찰로서 신앙과 예불 등 종교 활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석불은 남아 있지만 오층석탑은 최근에 반출되었다고 한다.
문주리 사지는 석탑과 석불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창건된 절로 폐사(廢寺) 시기는 알 수 없다. 사찰 가람에서 석탑은 한가운데 배치되어 상징적인 역할과 동시에 신앙의 중심이었다. 석불은 전각 안에 봉안되어 법회나 예불 활동의 주요 대상이 되었다. 문주리 오층석탑은 사찰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가람의 중심에 배치되어 경내로 들어서는 불도들에게 참배의 대상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충청북도 충주시 대소원면 문주리 탑동 민가 옆에 석불과 함께 세워져 있었다.
석탑은 전체적으로 마모와 부재들이 결실되기는 했지만 원래의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었다. 기단부는 바닥에 판석형 지대석을 깔아 단층으로 마련하였다. 면석부는 판석형 석재를 결구하여 마련하였으며, 좌우 모서리에 우주를 모각하였다. 우주는 낮게 모각되어 형식화된 경향을 보이고 있다. 갑석은 괴임이나 받침이 마련되지 않은 간략한 치석 수법으로 결구되었다.
탑신부는 일반적으로 탑신석과 옥개석을 별석(別石)으로 치석하여 결구되었다. 고려시대에 접어들어 석탑의 규모가 소형화되면서 일부 석탑의 경우 탑신석과 옥개석을 동일석으로 치석하는 경우가 많이 나타난다. 이는 고려시대 들어와 불교가 크게 성행하면서 다량의 석탑이 만들어졌고, 이에 따라 장인이나 지역에 따라 다양한 치석과 결구 수법이 채용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문주리 오층석탑은 1층의 경우 1층 탑신석과 옥개석뿐만 아니라 2층 탑신석 일부까지 동일석으로 하여 보기 드문 치석 수법을 보이고 있다. 이는 석탑에 대한 신성성이 그만큼 상쇄되고, 기능적인 측면이 많이 중시되어가던 경향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탑신석과 옥개석은 상층으로 올라가면서 좌우 너비와 높이에서 일정한 체감율을 보이고 있어, 세장하지만 안정적인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탑신석 좌우에는 우주를 모각하였다. 옥개석은 평박하게 치석하였고, 하부의 받침은 1층과 2층은 4단, 3층 이상은 3단으로 마련하였다. 낙수면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도록 하였으며, 처마부는 두툼하게 치석하였다. 상륜부는 사각형 노반(露盤)과 원형 복발석(覆鉢石)이 올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 건립시에는 찰주(擦柱)를 세워 여러 부재들이 결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관련 금석문은 남아 있지 않다.
[도난당하기전의 문주리 오층석탑의 모습입니다]
문주리 오층석탑은 탑동 민가 옆에 세워져 있었는데, 현재는 반출되어 행방을 알 수 없다. 반출되기 전 오층석탑은 일부 부재가 결실되고 파손되기는 했지만 단층 기단에 5층의 탑신부로 구성된 전형적인 고려시대 양식의 석탑이었다.
석탑은 고려시대로 들어와 통일신라시대 석탑 양식을 계승하면서 서서히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기단부를 간략하게 구성하거나 단층으로 마련하며, 각 부에 마련되는 괴임단이 생략되기도 하고, 탑신부는 석탑의 규모가 소형화되면서 고층으로 고준하게 건립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고려 초기를 지나면서 두드러진 양상을 보인다. 문주리 오층석탑은 고려 초기를 지나면서 점차 고려화되는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양식사적 의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부재의 치석과 결구 수법이 간략화되는 고려 초기 직후의 경향이 강하게 반영된 석탑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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