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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원면 매현리 이승소신도비(大召院面 梅峴里 李承召神道碑)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대소원면 매현리 이승소신도비(大召院面 梅峴里 李承召神道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7. 2. 21. 09:38



대송원면 매현리에 있는 청간사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이승소의 신도비입니다.

몇년전에도 보이지 않던 신도비인데 신도비의 형태로 보아 근간에 새로 만든 듯 합니다.

신도비가 있는 길을 따라 들어가면 산자락 쪽으로 이승소의 부조묘인 사당 청간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조선 전기 충청감사를 역임했던 문신.


이승소는 본관은 양성(陽城). 자는 윤보(胤保), 호는 삼탄(三灘). 고려 말 시중을 역임한 이춘부(李春富)의 4세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이옥(李沃), 할아버지는 이사근(李思謹), 아버지는 병조판서에 추증된 이온(李蒕)이다.


1422년(세종 4) 태어난 이승소(李承召)는 1438년(세종 20) 17세로 진사시에 급제하고, 1447년 식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집현전부수찬이 되었다. 이어 부교리, 집현전응교를 거쳐 1454년(단종 2) 사헌부장령이 되었다. 세조가 즉위하자 집현전직제학으로서 원종공신 2등에 올랐으며, 1456년 집현전응교를 거쳐 1458년(세조 4) 예조참의가 되어 『초학자회언해본(初學字會諺解本)』을 찬정하였다.

이어 형조참의와 호조참의를 역임하고, 1459년 사은사(謝恩使)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이조참의와 예문관제학을 지냈다. 1462년 예문관제학과 성균관사성을 겸하고, 세조가 지은 『병장설(兵將說)』을 찬수하였다. 1466년 충청감사로 충청감영이 있는 청주로 부임했다. 예종이 즉위하자 예조참판이 되어 명나라와의 외교 업무를 무난히 처리하였다.

1471년(성종 2) 순성좌리공신 4등에 오르고 양성군에 봉해졌으며, 예조판서가 되어 지경연사로서 경연을 강화하였다. 1472년 민간에 산재한 조종의 법전을 거두어 춘추관에 보관하게 하였고, 역사서의 간행·보급을 주청하였으며, 1475년 교육의 강화와 불교 억제에 대한 주장을 제기하였다. 또한 여러 차례에 걸쳐 과거를 주관, 인재 등용에 힘썼고, 왜인·야인의 접대를 주관하였다. 이어 우참찬을 거쳐 1480년 이조판서, 형조판서를 역임하면서 신숙주(申叔舟) 등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하였다.

1480년 주문사(奏聞使)의 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정사였던 한명회(韓明澮)의 사헌궁각(私獻弓角) 사건에 연루되어 사간원으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이후 이조판서, 형조판서, 의정부우참찬, 의정부좌참찬을 지냈고 1483년 신병이 심해져 사직을 주청한 후 명예직인 중추원지중추부사를 지내다가 1484년(성종 15) 62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예(禮)·악(樂)·병(兵)·형(刑)·음양(陰陽)·율(律)·역(曆)에 두루 통달하였다. 우연히 사물을 접하더라도 대체(大體)를 알고자 널리 독서하였고, 특히 문장으로 이름을 남겼다. 청렴하여 집안을 장식함에 꾸민 것이 없었다고 한다.


『명황계감(明皇誡鑑)』을 한글로 옮겼으며 문집으로 목판본 『삼탄집(三灘集)』 6책 15권이 있다. 『삼탄집』은 이승소의 외손자인 이수동에 의해 청주판이 간행되었으며, 1513년(중종 8) 함흥판, 1535년(중종 30) 청주판의 중간본이 간행되었다. 현재 『삼탄집』은 청주판 2책이 국립도서관에 전하고 있으며, 함흥판은 이승소의 후손 이용신이 소장하고 있다. 『함흥판본삼탄집(咸興板本三灘集)』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7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금석문으로는 1469년에 찬한 황수신(黃守身) 신도비와 1474년 찬한 송복산(宋福山) 묘갈이 있다.


1968년 신도시 개발로 과천 묘소를 충주시 대소원면 완오리로 이장하고 이승소 신도비를 건립했으나 첨단산업단지 조성으로 다시 대소원면 매현리로 옮겼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874년 국가의 명에 의해 부조묘가 건립되었고, 1987년 5월 문간공재실건립추진위원회 주도로 청간사(淸簡祠)를 낙성하여 배향했다. 매년 음력 3월 13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매현리는 충청북도 충주시 대소원면 에 속하는 법정리.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 지역에는 매산리, 수현리, 기동, 장승리 네 개 마을이 있었다. 이 중 큰 마을인 매산리와 수현리의 첫째 자와 둘째 자를 따서 매현리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매산리에는 조선 초기 좌찬성을 지낸 양성이씨 이승소의 후손들이 낙향하여 살았다. 매산리는 충주에서 목도로 이어지는 육로의 한 가운데 있으며 달천으로 이어지는 수로에서는 조금 벗어나 있다. 매산리에 대한 기록은 1760년에 발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없고 1898년에 나온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 처음 나온다. 매현리의 중심 마을은 매산이었다. 매산은 매봉재에서 시작되는 매화낙지혈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에도 수현리가 있었겠지만 읍지에 언급될 만큼 크지는 않았던 것 같다.

1914년 행정구역을 통폐합하면서 매산과 수현을 합쳐 매현리가 만들어졌으며 이후 매현리는 충주군 대소원면의 13개 법정리에 속하게 되었다. 1973년에는 하문리가 괴산군 불정면에 편입되면서 대소원면의 법정리는 12개가 된다.


매현리는 대소원면의 동남쪽 월은치와 대간치 사이에 위치한다. 월은치와 대간치 사이에 하천이 흐르고, 하천변에 마을이 있다. 매산과 수현이 중심 마을이지만 그 외 작은 마을로 텃골, 아랫말, 사당골, 장승백이가 있다. 매현리는 충주에서 괴산군 불정면으로 이어진 지방도 525호선을 따라 가다 탄용리를 지나면 나온다. 충주시 가주동 쪽에서는 월은치를 넘어 접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방면으로 가도 교통은 불편한 편이다. 2004년 12월 중부내륙고속국도가 개통되면서 매현리를 지나는 매현터널이 두 개 생겨났다. 이들 터널의 이름은 매현1터널과 매현2터널이다. 이 터들들을 지난 중부내륙고속국도는 문주리로 해서 괴산군 장연면 조곡리로 이어진다.


과거 한때 충주까지 거리가 너무 멀고 교통이 불편해 불정면 목도리로 중고등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충주로 나오는 지방도 525호선과 수주팔봉으로 이어지는 지방도가 잘 포장되어 있어 이동이 쉬운 편이다. 그럼에도 매현리는 이웃하고 있는 탄용리와 함께 대소원면에서 가장 오지이다. 교육 기관으로 달천초등학교 매현분교가 있고, 주요 기관으로 매산보건진료소가 있다. 문화 유적으로 이승소 신도비와 문화유씨 열녀문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