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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산성과 이인좌와 이봉상. 본문

전설따라 삼천리/전설 그리고 민담등

상당산성과 이인좌와 이봉상.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7. 4. 14. 07:46




[이봉상,남연년,홍림 의 위패가 있는 표충사입니다]



이인좌(李獜佐)가 군사를 일으킬 때, 처음에는 상여로 꾸미고 병기를 묶어 관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상여를 메고 가는 상여꾼들이 모두 적도(賊徒)였다.

수십 개의 상여를 메고 청주성(淸州城)으로 들어오니, 영장(營將) 충장(忠壯) 남연년(南延年)과 막객(幕客) 홍림(洪霖)이 병사(兵使) 이봉상(李鳳祥)에게 말하였다.

 

   “상여가 성내로 많이 들어오다니, 일이 몹씨 괴이하고 의심스럽습니다. 청하옵건데 그들을 수색하여 살펴보십시오.”

   병사가 술에 취해 대답했다.

   “지나가는 상여를 하필 의심하는 것인고? 군들은 물러가게.”


   그날밤 야반이 가까운 시각에 한쌍의 까치가 누대의 대들보를 오르내리며 짹짹거렸는데 쫓아도 가지 않았다.

그러더니 얼마되지 않아 성 안에서 난이 일어났는데 큰 난리였다. 적병들이 감영 문을에워싸고 들어가니, 병사가 혼몽한 가운데 뒷뜰 대나무숲 안으로 달아나 피하였다. 충장이 누 위에 앉아 호령하니, 어떤 적병이 그에게 병사의 거처를 물었다. 충장이 말했다.

 

   “병사(兵使)는 바로 나다.”


   적을 꾸짖으며 굴하지 않다가 마침내 해를 당하였다. 적중에 병사의 얼굴을 아는 자가 있어 충장을 보고 병사가 아니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대나무숲에 이르러 병사를 칼로 찔러 죽였는데 홍림이 자신의 몸으로 그를 덮고 있다가 함께 해를 입었다.

조정에서는 병사(兵使) 영장(營將) 비장(裨將) 모두에게 정려(旌閭)와 증직(贈職)의 은전을 베풀어 주었다.


   그 후 어떤 사람이 청주성 안에 있는 남석교(南石橋) 위에 시를 지었다.


   삼경에 우는 까치 대들보 감싸고 시끄러운데

   촉불 꺼진 화당(華堂)은 취해 혼몽하도다.

   비장은 연막(蓮幕)의 절개를 능히 보전하였거늘

   원융(元戎)은 도리어 대나무숲의 혼이 되었도다.

   운유(雲惟)는 죽어 당사(唐史)를 전했는데

   능(陵)은 홀로 무슨 마음에 한(漢)나라의 은혜 저버렸느뇨.

   가소롭나니 어부 앉아 공(功) 받는 것을

   일시의 영총(榮寵)이 향촌에 빛나도다.


   이 시가 전파되었으나 누구의 작품인지를 알지 못했다.

또 그 후에 남충장을 이장할 때 알고 지내던 옛친구 가운데 만장(挽章)을 청하였는데, 유생 유언길(兪彦吉)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곧 지추(知樞) 유언술(兪彦述)의 사촌형이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내 목 가히 자를 수 있어도 무릎꺾기는 어렵나니,

   천개의 창이 삼삼(森森)하고 만개의 칼날이 우뚝하도다.

   이날 밤의 사람 정절 능히 갖추었거늘,

   저물어가는 봄 하늘이 전풍(電風)으로 슬퍼하도다.

   한나라의 변방에서 장권(張拳)하다 죽은 것과 명실상부하노니,

   성(姓)이 수양(睢陽)을 회억하여 손가락 깨물며 돌아오도다.

   오영(五營)의 순무사(巡撫使) 가소롭나니,

   차마 아무 일 없는 듯 머리 들고 올 수 있으리오.


   이봉상의 자손들이 이 시를 보고 청주성의 시 또한 이 사람이 지은 바일 것이라고 지목하였다.

그로 인해 이씨의 자손들이 불평을 호소한 지경에 이르게 되어 유생은 마침내 유배를 입었으니, 이는 곧 시에서 보인 유씨의 의견 때문이었다.



☞ 주

<이인좌(李獜佐.?∼1728.영조 4)> : 반란자. 본관은 광주(廣州), 영의정 준경(浚慶)의 후손. 영조의 즉위로 소론이 실각하자 소론의 불평분자들을 규합, 정희량과 공모하여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추대 무력에 의한 정권쟁탈을 꾀했다. 1728(영조4)년 3월 상여에 무기를 싣고 청주(淸州)에 잠입,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봉상을 죽이고 대원수라 자칭, 각처에 공문을 돌리고 병마를 소집하는 한편 진천(鎭川)을 거쳐 죽산(竹山), 안성(安城) 등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용인(龍仁)에 웅거 중이던 최규서(崔奎瑞)의 고변으로 출동한 도순무사 오명항(吳命恒)의 관군에 의해 죽산 싸움에서 대패하여 절에 숨었다가 부락민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 처형당했다.

<진영장(陣營將)> : 조선조 때 각 진영의 으뜸 장관.

<남연년(南延年..1653.효종 4∼1728.영조 4)> : 무신. 자는 수백(壽伯). 1676(숙종2)년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영장이 되어 토포사를 겸임. 이듬해의 난 때 이를 맞아 싸우다 성이 함락되자 잡혀 살해되었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 표충사에 제향. 시호는 충장(忠壯).

<이봉상(李鳳祥.1676.숙종 2∼1728.영조 4)> : 무신. 본관은 덕수(德水), 순신의 5대손. 1702(숙종28)년에 무과에 급제, 포도대장‧훈련원 도정‧삼도수군통제사 등을 역임. 영조가 즉위하자 한성부 우윤‧형조참판‧훈련대장 등을 역임하다 이광좌의 미움을 받아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좌천, 1728(영조4) 이인좌가 난을 일으키자 충주에서 난군에게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좌찬성에 추증. 청주의 표충사에 제향.

<연막(蓮幕)> : 화려한 저택.

<원융(元戎)> : 군사의 우두머리. 여기에서는 병사 이봉상을 지칭함.

<이릉(李陵)> : 한나라 사람. 이경(李慶)의 손(孫). 자는 소경(少卿). 기마와 활쏘기에 뛰어나 한무제 시 기도위(騎都尉)를 배수하였다. 보병과 기병 5천을 거느리고 흉노족 칠 것을 자청하였는데, 적은 숫자로 많은 군사를 공격하였다. 적을 만나 힘써 싸웠으나 화살이 다 떨어짐에 항복하였다. 흉노의 수령 선우(單于)의 딸을 아내로 삼아 그 곳에서 20년 동안을 지내다가 병사하였음.

<어부앉아 공 받는 것> : 어부지리(漁父之利)한 공훈을 일컬음.

<유언술(兪彦述.1703.숙종 29∼1773.영조 49)> : 1736년 알성문과에 급제, 1757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 1772년 대사헌이 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감. 시문(詩文)에 뛰어남.

<장권(張拳)> : 주먹을 들어서 치다. 병기가 다 없어져 다만 빈 주먹을 들어 칠뿐이라는 말. 이릉(李陵)과 관련된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오영(五營)> : 오군영(五軍營). 조선조 때 임진왜란 이후 오위(五衛)를 고쳐 둔, 훈련도감 총융청 수어청 어영청 군위영의 다섯 군영  

- <청구야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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