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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면 봉곡리 덕산재(陽山面 鳳谷里 德山齋)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영동군(永同郡)

양산면 봉곡리 덕산재(陽山面 鳳谷里 德山齋)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7. 5. 25. 06:39



양산면 봉곡리에 자리하고있는 함양여씨 옥천파덕산종중재실(咸陽呂氏 沃川派德山宗中齋室)입니다.

덕산재(德山齋)라는 현판을 달고 있으며 적벽돌로 근간에 새로지은 건물입니다.

건물입구에는 한양여씨재실임을 알리는 간판과 더불어 덕산재의 내용을 기록한 덕산재기(德山齋記)라는 비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呂)씨는 본관은 함양() ·성주()의 2본이다. 문헌에는 30여 본이 전하나 대부분 함양여씨와 성주여씨의 세거지()를 나타낼 뿐이다. 여씨의 선조는 본디 당나라 사람으로, 877년(헌강왕 3)에 황소()의 난을 피해 신라에 귀화하였다고 전한다. 그뒤에 함양 ·성주 ·밀양 ·김해() 등 4본으로 분적했다고 하는데, 오늘날 밀양여씨와 김해여씨는 전하지 않는다. 함양여씨의 시조는 고려시대에 공조전서()를 지낸 어매()이며, 그의 9대손인 칭() 이후 많은 명신을 배출하였다. 칭은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 조선 태조 때 도총제() ·형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청빈하기로 이름났다. 그의 증손 자신()은 성종~중종대에 걸쳐 이름난 무신으로 병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함양여씨는 칭의 8대 손인 우길() ·유길()의 대를 고비로 선조~숙종대에 걸쳐 가장 위세를 떨쳤다. 우길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광해군 때 관찰사에 이르렀는데, 대명외교()에 공헌하고 임진왜란 뒤에는 일본에 건너가 중단된 국교를 회복시켰다. 독립운동가 운형()은 우길의 11대손이다. 유길은 선조 때 알성문과에 급제, 광해군 때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유길의 아들 이징()은 인조 때 문과에 급제, 대사헌 도승지 부제학 등을 지냈는데 성리학에 밝고 천문 ·역법() ·시문 ·서화에도 뛰어났다. 또 그의 종제() 이재()는 인조 때 문과에 급제, 심기원()이 모반했을 때 공을 세워 영국공신()에 책록되고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함양여씨의 유일한 상신 성제()는 소론()의 한 사람으로서 영의정에 이르렀다가, 남인()과 의견이 맞지 않아 사소()를 올린 끝에 중추부판사로 전임하였다. 한편 성주여씨의 시조는 고려시대에 진사를 지낸 양유()이며, 성주여씨의 대표적 인물로는 희림()을 들 수 있다. 그는 중종 때 진사시에 합격, 왕자사부가 되었는데 당대의 학자로서 이름이 높았다. 여씨는 조선시대에 문과급제자 51명을 배출하였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 3만 271명으로서 성별순위는 258성 중 63위였고, 1985년도 국세조사에서는 1만 1714가구, 인구 4만 8914명으로서 순위는 274성 중 64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