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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북면 이백리 이지당(郡北面 二栢里 二止堂) 본문
이지당은 군북면 이백리에 위치하고 있다.이백리(二栢里)는 원래 옥천군 군북면 증약리에 속해있던 마을로, 후에 증약리(增若里), 자모리(自慕里), 이백리로 나누어 현재에 이른다.1739년 여지도서에는 군북면 증약리라 하여 287호가 살았는데, 이때는 자모, 증약, 이백리를 관할하였다. 1891년 신묘장적에는 군북면 증약리에 172호가 살았는데, 이때는 자모와 비하동리(飛霞洞里)가 분리되고 증약리와 이백리만 관할하였다.1908년 군, 면의 행정구역 조정 때 군북면을 군북일소면(郡北一所面)과 군북이소면(郡北二所面)으로 나누었는데, 이때 증약리는 일소면에 소속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을 일제정비하면서, 일소면과 이소면을 합쳐 다시 군북면이라 고치면서 이때 증약리와 이백리로 나뉘었다.
이백리라 부르게 된 것은 자연마을들을 합쳐 새로운 리동을 만들면서 이지당(二止堂) 마을의 이 자와 백석(白石)의 백 자를 잣백(栢)자로 고쳐 이백리라 부르게 되었다. 이지당은 금씨, 안씨, 조씨, 이씨가 세운 각신서당(覺新書堂)이 있었는데, 조헌(趙憲) 선생이 후학들을 가르친 서당으로 유명하며,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이지당이라 이름 지어주면서 마을이름도 이지당말이 되었다.
백석은 “힌독골”의 옛이름을 한자로 쓰면서 “흰”을 흰백, “독”을 돌석으로 써서 백석골이 되었다. 마을 앞에 흰차돌이 많았기 때문에 “흰독골”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이백리의 자연마을은 평지말, 이지당말, 흰독골, 갯골(객골), 노란이(老安里) 등이 있고 2007년말 현재 이백1리에 150호 356명, 이백2리에 115호 389명이 살고 있다.이백리 마을앞쪽으로 고리산성이, 뒤쪽으로는 군서면 오동리와의 사이에 노고산성(할미성)이 위치해 있다. 이곳은 백제군의 최전방 요새지로, 항상 싸움이 끊이지 않은 지역이었다. 개동산이라 부르고 있는 노고산성이 축성된 마을뒷산 아래 `노란이'라는 지명의 유래다.
남쪽으로는 옥천과 군서를 연결하는 통로를 방어하면서 동쪽으로는 경부선 철도를 넘어 세워진 환산성과 함께 옥천과 대전을 연결하는 통로를 방어했던 곳이 노고성이고 군서면 오동리 무중골, 이백리 갯골 사이에 숯고개가 있다. 이 숯고개가 바로 백제의 흥망을 좌우했다는 ‘탄현’이라는 말이 전한다.특히 성왕이 죽은 곳으로 알려진 구진벼루라는 지명과 관련해서도 논란의 중심에 있는 마을이 이백리이다.즉 이백리 앞 고리산성 아래 골짜기를 승지골로 부르고 있는데, 이는 백제, 신라 전쟁 초기 백제군이 신라군에 대승을 거두었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성왕의 태자인 여창이 고리산에 주둔하고 있고, 신라 군사가 이곳을 공격하려고 기어오르려다 마침 도착한 성왕이 급습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이후 성왕은 왕과 태자가 성에 함께 있을 수 없다 하여 태자가 주둔한 성의 서쪽에 있는 노고성에 오르기 위해 이백리 갯골(한자로는 拘川)에 이르렀고, 이때 신라군의 급습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고 하는 것이 구진벼루를 군서면 월전리가 아닌 군북면 이백리로 보는 견해다.이백리는 면사무소와 우체국, 농협 등 행정기관과 금융기관이 모여 있어 군북면 중심지 구실을 하고 있고, 1966년 축조한 갯골소류지가 있다.
이지당은 조선중기 성리학자인 중봉 조헌선생이 후학을 교육하던 서당으로 처음에는 각신동이라는 마을앞에 있었음으로 각신당이라 하였으나 그 뒤에 우암 송시열의 시전에 있는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 " 라는 문구에서 끝의"止" 자를 따서 이지당이라 하였다. 그 후 퇴락된 것을 1901년 광무 5년에 옥천읍 옥각리의 금씨, 이씨, 조씨, 안씨, 네 문중에서 재건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건물 구조는 목조 기와집으로 정면 일곱칸 측면 한칸의 팔작인데 가운데 삼칸은 대청이고 서편의 삼칸 중 두칸이 방이고 한칸은 부엌이며,부엌 위를 이층으로 하여 두 칸의 루각을 만들었다. 그리고 동편 한칸은 방이고 방위의 이층을 두칸의 루각을 만들어 여름에 사용하기에 좋도록 지었다. 이곳에는 송시열선생이 친히쓰신 "二止堂" 이라는 편액이 걸려있고 중봉조헌 선생이 친히 쓰신 "覺新書堂"이라는 등은 현재 향토자료전시장에 보관되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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