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동이면 금암리 목담영당(東二面 金岩里 鶩潭影堂)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동이면 금암리 목담영당(東二面 金岩里 鶩潭影堂)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7. 6. 22. 08:00

 

 

 

 

동이면 금암2리에서 호천과 효자문을 둘러보고 눈을 들어 길 건너를 바라보면 전식의 영당이 있는 목담영당과 더불어 양신정을 볼수있다. 목담영당앞까지 차량출입이 가능하나 농로이다 보니 큰 길가에 차를 세우고 도보로 가는것이 편하다. 큰길에서 약 50여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삼문에는 통인문이란 현판을 걸고 있으며 막돌로 담장을 둘렀으며 후손들에 의하여 잘관리되고 있다. 목담영당 옆으로는 전팽령이 밀양부사를 그만두고 1545년 고향에 왔을 때 쉬면서 글을 읽기 위해 지은 '옥천 양신정'(충청북도 기념물 29호)이 있다.

당시 건물은 정유재란(1597년) 때 불에 타버렸으며 현재의 정자는 1828년(순조28년) 다시 지은 것으로 정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 목조의 기와집이다.

 

 

 

금암리는 군동면(郡東面) 용암리(龍岩里)라 불리던 마을이며, 1739년 기록에는 군동면 용암리에 47호가 살았고 1891년 신묘장적(辛卯帳籍)기록에는 55호에서 15세 이상 255명이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007년말 현재 금암1리가 52호, 금암2리가 44호 금암3리가 100호 총 196호가 살고 총 인구는 467명이다. 범양정밀주식회사를 비롯하여 5개의 기업체에서 116명이 종사하고 있다.

금암리 유래는 마을 뒤에 용암사란 절이 있고 큰 바위들이 용같이 뻗었다 하여 용암말 이라 불렸고 옆마을이 목시, 목쇠인데 목쇠는 목금(木金)으로 목금의 금(金)자와 용암의 암(岩)자를 따서 두 마을의 뒷글자를 합쳐서 금암리가 되었다.

금암리에는 충청북도문화재인 1545년 송정 전팽령이 건립한 양신정(養神亭)과 1765년 유림들에 의해 세워진 목담서원이 있다. 목담서원(鶩潭書院)과 목담서원에 모셔진 사서공 전식 선생의 영정, 명종 때 효자를 기리기 위한 효자정과 효자비, 그리고 그 효행을 뒷받침 하는 호천(虎泉) 등이 있다.

임진란 때 중봉 조헌선생을 도운 인봉 전승업선생은 개전초기에 중봉선생을 의병장으로 추대 의병 100명과 군수품을 모아 보은 차령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금산전투 후 연곤평에서 순절한 의병과 승병 1,000여명의 시신을 모아 오늘의 칠백의총을 만들고 중봉선생 유족을 돌보았다.

자연마을로는 압구정, 등나무마을, 새말, 솔밭말, 건너말, 용암말, 안골말, 황새골, 옥고대, 말참묵이가 있고 건너말은 빈집만 남아 있다. 용암말에 오필렬효자문과 청주한씨(淸州韓氏)효부비가 있다.

압구정은 고창오씨(高敞吳氏)가 입향조인 공조참의 오천(吳泉)공이 세종 16년(1434년)에 이곳에 터를 잡은 이래 20여대를 이어 살고 있다. 1978년 취락구조사업으로 적하리 분지벌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금암리로 집단이주 창앞마을을 이루었다.

압구정 뒤에 서당골이 있고 앞에는 갯들, 나마터, 씨드물, 돌가티, 부단지골, 막은골, 줄골이 있고 새마을 앞에서부터 대정목, 모새골, 샘골 그 앞에 새골이, 바위틈새골, 봇들, 못안이 있고, 둥구나무 마을 앞에 방아다리, 용암말 주변에 장나무골, 부흥산, 가는골, 서당골, 턱갈메기, 산지당, 탑선골, 당수말, 말래, 홍고개, 삼거리, 증갱이, 못안이 있다.

말참묵(말차목)이 앞에 수우골, 긴다랭이골, 탑송골, 부차골이 있다. 새말 주변에 줄골, 갯들, 강당, 봇들, 못안골, 찰방재, 새골, 샘골, 동자말, 새말 앞들이 있고 황새골, 못안, 섬말, 골말, 장수마루, 수골, 새터말, 뒷골, 삼거리, 찰방재가 있다.

 

 

 

 

전식(全湜ㆍ1563∼1642)은 자는 정원(淨遠), 호는 사서(沙西), 본관은 옥천(沃川)으로 유성룡(柳成龍)ㆍ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선조 22년(1589년) 진사가 되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왜적 수십 명을 죽이고 김익남(金益南)의 추천으로 연원도 찰방(連原道察訪)이 되었다. 160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했으나 광해군(光海君)의 실정으로 벼슬을 단념하고, 정경세(鄭經世)ㆍ이준(李埈) 등과 산수를 유람, ‘상사(商社)의 삼로(三老)’라고 일컬어졌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예조정랑(禮曹正郞)에 등용, 기주관(記注官)ㆍ지제교(知製敎)를 겸했고, 부수찬(副修撰)이 되어 경연에 참석했다. 이어 장령(掌令)을 지내고 인조 2년(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태복시정(太僕寺正)으로서 왕을 호종하여 집의(執義)ㆍ병조참지(兵曹參知)에 올랐다가,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와 원수(元帥) 장만(張晩)의 실책을 논한 뒤 고향에 돌아갔다. 1628년 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적을 방어하였고, 그 뒤 1642년 지중추부사 겸 동지경연춘추관사(知中樞府事兼同知經筵春秋館事)에 임명되고 대사헌에 보직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이 초상화(충북유형문화재 제171호)는 단령(團領ㆍ깃을 둥글게 만든 공복)과 사모관대(紗帽冠帶)를 정장한 뒤 바닥에 채전(彩氈)을 깔고 교의자(交椅子)에 반우향으로 앉아서 발을 의답(椅踏) 위에 올려 놓고 공수한 자세로, 모시 바탕에 그려서 비단으로 배접한 136㎝×92㎝ 크기의 족자이다. 원래는 모시바탕에 먹만 칠하였는데 후에 다시 색을 입히고 얼굴과 가슴부분에 색을 더하였다. 가슴부위에는 연꽃과 부엉이를 수놓았는데 당시의 자수풍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문중의 기록에 의하면 충북 옥천군 동이면 금암리 목담영당(鶩潭影堂)에 소장된 이 초상화는 1819년에 상주(尙州)에서 옮겨 배향한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대략 이 무렵에 이모(移模)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비단은 올이 촘촘하고 두터우며 폭이 좁은 조선 비단을 세 번 결봉하여 사용했고, 표구는 조선시대의 족자 형태이나 매우 심하게 헤진 상태이다.

 

 

 

 

 

 

 

 

 

 

 

 

전(全)씨라는 성을 이쁘게도 각인하였다.배롱나무 꽃이 참 지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