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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면 장위리 마을유래비와 세거비(靑山面 長位里 마을由來碑와 世居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청산면 장위리 마을유래비와 세거비(靑山面 長位里 마을由來碑와 世居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7. 6. 29. 10:54


청산면(靑山面)은 원래 신라초에 굴산현이었는데, 경덕왕 16년(757년)에 기산현이라 고치고, 삼년산군(현재 보은) 영역으로 하였다.


고려 현종 9년(1018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청산현(靑山縣)으로 고치고 경상도 상주목의 직속으로 하였다.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이관되면서 충청도의 10현 중의 하나인 청산현이 되고, 현감으로 종 6품과 향교에서 가르치는 훈도로 종9품이 각각 배치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해인 태종 14년(1414년)에 황간현과 통폐합되어 황청현이라 고친 후 청산현감을 두고

상주의 주성부곡(보은 내북면)을 청산에 부속시켰다.


1739년에 발행한 여지도서에는 청산현에 현내면, 북면, 동면, 남면, 서면, 주성면 등 6개면이 있었으며 현 청산면 관내인 북면에는 장연동리, 만월리, 대사전리, 예곡리 등 4개리 292호에서 15세 이상 된 사람 1,223명이 살았고, 동면에는 가지리, 효림리, 인정리 등 3개리 262호에서 15세 이상 된 사람 1,284명이 살았다.


그리고 청산현의 소재지인 현내면은 백운동리, 저전리, 하동리, 장위리 등 4개리 478호에서 15세 이상 된 사람 2,209명이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895년에는 청산현(靑山縣)이 청산군(靑山郡)으로 잠시 승격되어 현내면을 군내면(郡內面)이라 고쳤고 평상, 교동, 백운, 상지전, 하지전, 하동, 천서, 자매, 학촌, 신평, 덕곡, 대사, 장위리의 13개리를 관할하였다. 이후 1914년 3월 1일 군면 통폐합에 따라 군내면과 북면 대부분, 동면 등 3개면을 합하여 청산면이라 고치고, 옥천군에 영속케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청산면의 면적은 77.5㎢이며 군내에서 가장 동부에 위치하고 있다. 면의 동쪽은 경북 상주시 화동, 모서면에, 서는 청성면에, 남은 영동군에, 북은 보은군 마로면에 각각 닿는다.




장위리(長位里)는 원래 청산현 현내면 장위리에 속해있던 마을이며 후에 한곡리(閑谷里)와 장위리(長位里)로 나뉘어 현재에 이른다.


1739년이나 1891년 기록에 청산현 현내면 장위리라 하여 129호가 살았다고 되어 있다. 2007년 현재 84호 179명이 살고 있다. 1914년 읍면 행정구역 통폐합 때 청산군이 없어지고 옥천군에 소속되면서 현내면과 동면 합해져 청산면이 되었고 이때 장위리를 한곡과 장위로 나누었다.


장위리라 부르게 된 것은 국화산(菊花山)과 두루봉이 뻗어내려 장사래(長沙來) 배터마을이 이루어진 곳으로 장위리에서 한곡리까지 비산비야(非山非野, 낮은 산줄기)가 길게 있다하여 긴 장(長) 자리 위(位)자를 써서 장위리(장사랫들)라 하였다.

음지말 뒷산은 매봉재라고 하며 꿩이 9개의 알을 품고 있어 구치라고 하는데 매가 그것을 노리고 먹을 것을 찾고 있다고 해서 매봉재라 전해진다. 양지말에는 전주유씨가, 음지말에는 경주김씨가, 영싱이에는 밀양손씨가 주로 모여 살았다. 안산김씨가 처음으로 마을에 들어와 터전을 잡았다고는 전한다.


영신이 마을 뒤에는 신라 때의 절터(迎神寺, 영신사)가 지금도 남아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음지말, 양지말, 영싱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