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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시 송악면 외암마을 이간 묘소(牙山市 松岳面 巍巖마을 李柬 墓所) 본문
외암마을을 휘이 한바퀴돌다가 야트막한 야산에 노송이 우거진곳이 보인다
외암 이간선생의 묘소이다.세월을 입은 노송들이 군락을 이루고 그 사이에 넒은 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1677(숙종 3)∼1727(영조 3).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공거(公擧), 호는 외암(巍巖)·추월헌(秋月軒). 아버지는 부호군 태형(泰亨)이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이며,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 중 한 사람이다.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낙론(洛論)인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1710년(숙종 36) 순무사이만성(李晩成)에 의하여 장릉참봉(莊陵參奉)으로 천거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716년 다시 천거되어 세자시강원자의가 되었는데, 이 때 그의 나이가 적은데도 계급이 뛰어오름을 논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717년종부시정을 제수받고, 1725년(영조 1)회덕현감·경연관을 거쳐 충청도도사 겸 해운관·익위사익위를 제수받았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조선조 성리학은 중기를 고비로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과 이이(李珥)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의 대립 이후 치열한 논변이 벌어졌다. 중기에 접어들면서 한동안 잠잠했던 사단칠정 논변이 주리(主理)와 주기(主氣)의 논변으로 이행됨으로써 성리학의 불꽃이 재연되었다. 그것은 주기적인 이이계통의 기호학파(畿湖學派) 안에서 다시 주리와 주기로 대립하여 논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권상하의 문하에서 야기된 이른바 호락논쟁(湖洛論爭)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의 오상(五常)을 금수(禽獸)도 가지느냐 못 가지느냐 하는 문제, 그리고 사람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정(情)이 발동하지 아니하였을 때[未發]의 상태, 즉 심체(心體)에 기질(氣質)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 등을 논의하다가 의견의 대립이 생겼다. 본격적인 논쟁은 권상하 문하의 이간과 한원진(韓元震)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권상하가 한원진의 설에 찬동하자 이것이 점차 확대되어 전국의 석학들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이간의 설을 지지하는 이재(李縡)·박필주(朴弼周)·어유봉(魚有鳳) 등의 낙하(洛下: 서울) 학자들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은 다 같이 오상을 가진다는 인물성구동론(人物性俱同論)과, 미발한 마음의 본체는 기질의 선악이 없으므로 본래선(本來善)이라 하여 미발심체본선론(未發心體本善論)을 주장하였다. 이것을 낙론(洛論) 또는 낙학(洛學)이라 부르게 되었다. 비록 이간은 호서, 즉 충청도에 살았지만 그의 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낙하, 즉 경기도와 서울에 많이 있었으므로 낙학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반대로 한원진의 설을 찬동하는 권상하·윤봉구(尹鳳九)·최징후(崔徵厚)·채지홍(蔡之洪) 등의 호서학자(湖西學者)들은 인성은 오상을 가지지만 물성은 그 오상을 모두 가지지는 못한다면서 인성과 물성은 서로 다르다는 인물성상이론(人物性相異論)과, 미발한 마음의 본체에도 기질의 선악이 있다는 미발심체유선악론(未發心體有善惡論)을 역설하였다. 이것을 호론(湖論) 또는 호학(湖學)이라 부르게 되었다.
호락론자들은 이이 계통의 기호학파에 속하므로 이이의 이른바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철칙으로 신봉하였다. 이통기국설은 주희(朱熹)의 이동기이설(理同氣異說)에서 유래한다. ‘이통(理通)’이란 이는 인(人)과 물(物)에 공통적·보편적인 것으로서 동일하게 상통한다는 것이고, ‘기국(氣局)’의 기는 인과 물에 국한적·특수적인 것으로서 상이하다는 것이다.
이간은 주리적 입장에 서서 이통과 이동(理同)을 내세움으로써 인성과 물성을 구동(俱同)으로 보아 한 가지로 오상을 가진다는 동시오상의 논리로써 그의 철학 체계를 일관시켰다. 이에 대해 한원진은 주기적 관점에서 기국과 기이(氣異)를 강조함으로써 인성과 물성을 상이한 것으로 보며, 그것은 기질의 차이로 말미암은 것이라 주장하여 인기(因氣)의 논리로써 그의 철학 체계를 세웠다.
다시 말하면, 주리적 입장에 서는 이간은 성(性)은 곧 이(理)이므로 인성과 물성은 모두 이로서의 태극(太極), 천명(天命)의 원형이정(元亨利貞), 사덕(四德)을 본성으로 품수함으로 말미암아 오상의 본연(本然)을 구유하므로 그들 본성은 이통으로 동시오상이라고 보았다. 다만, 인성과 물성이 상이한 것 같이 보이는 것은 그들 기질의 국한성, 즉 차이에 따라서 상이하게 드러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인과 물의 본성, 즉 본연지성(本然之性)은 동시오상으로서 구동이요, 또 사람의 미발심체는 본선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한원진은 주기적 경향이기 때문에 인성과 물성은 각기 그 기질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으로 상이한 것이며, 그 기질지성(氣質之性)이 각기 인과 물의 본연지성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인물의 본성, 즉 그 기질지성은 인기로서 상이한 것이요, 따라서 사람의 미발심체도 기질지성으로서 선과 악이 공재한다는 유선악론을 주장하였다.
이 양론을 보면 철학적 입장의 차이에 따라 방법론의 차이도 달라짐을 볼 수 있다. 이 호락 논쟁은 이간 이후 오래도록 계속되었지만 끝내 귀결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기되었던 여러 가지 문제들은 성리학의 근본 문제들이었고, 또 그 근본 문제를 해결하려는 철학적 방법론이 뚜렷이 드러나고 있는 것 등은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다.
저서로는 『외암유고(巍巖遺稿)』가 있다.
1777년(정조 1)이조참판·성균관좨주에 추증되고, 순조 때 이조판서가 증직되었다. 온양의 외암서원(巍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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