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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의종어필 비례부동탁본(明 毅宗御筆 非禮不動拓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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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의종어필 비례부동탁본(明 毅宗御筆 非禮不動拓本)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8. 2. 1. 11:44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전라도 정읍에서 숙종의 사약을 받기 직전 수제자 권상하(權尙夏, 1641∼1721)에게 서면으로 유지를 내려 명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 崇禎帝)의 사당을 짓고 제사를 모실 것을 당부했다.

권상하는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1703년 민정중·정호(鄭澔) 등 노론계 인물의 협력을 얻어 만동묘를 창건했다. 만동묘의 '만동'은 경기도 가평군의 조종암(朝宗巖)에 새겨진 선조 어필인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취한 글자다. 그 뜻은 만 번을 굽이쳐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이다.

양자강·황하 등 중국의 강은 서쪽이 높기 때문에 동쪽, 즉 우리의 서해로 흘러든다. 선조는 곡절은 있을 수 있지만 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충(忠)은 변함이 없다는 의미에서 만절필동의 새겼다.
명나라 신종은 임진왜란 때 20여만명의 대군을 파견, 조선을 왜로부터 구해준 인물로 '재조지은(再造之恩·다시 일어서게 도와준 은혜)'의 칭송을 받았다. 따라서 만동묘에 명나라 신종의 위패가 모셔지는 것은 당연한 것일 수 있다.

반면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숭정제)은 임진왜란과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만동묘에 나란히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의종은 1644년 이자성(李自成)이 이끄는 농민반란군이 북경을 점령하자 자결했다.
우암 송시열은 바로 이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우암에게는 홍석기(洪錫箕, 1606~1680)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송자대전》에 실린 <次後雲翁煥章菴七十一韻>(차후운옹환장암칠십일운)이라는 시에서 '나라가 망하면 임금이 죽는 것은 / 고금에 말뿐이었는데 / 우리 황제 홀로 이 일 판단했으니 / 천지가 무너져도 썩지 않으리'(國亡君死之 古今徒騰口 吾皇獨辨此 天壤壞不朽)라고 읊었다.



우암은 의종의 자결이야말로 바른 도리, 즉 의리(義理)를 실천한 것으로 봤다. 같은 노론계 인물인 민정중(閔鼎重, 1628∼1692)이 중국에 사신으로 갖다가 의종의 '非禮不動(비례부동)' 친필을 얻어왔다. 우암은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는 뜻의 이 친필을 접하고 매우 기뻐했고, 그리고 화양동 제 5곡인 첨성대(瞻星臺) 암벽에 새겨 영원히 전하고자 했다. 김수항(金壽恒)의 문집인 《문곡집》에 관련 시가 전해진다.

'지난해 사신으로 연경에 이르니 / 참담한 심정 무엇으로 흥망을 조문할까 / 다행히도 황제께서 남긴 필적 얻으니 / 하늘 향기 젖어 있고 봉황새 나는 듯 / 돌아와 화양동에 새기고 / 호위함은 삼승의 중들에게 부탁했네 / 효종의 영령도 여기에 내리실 것이니 / 유명이 다르므로 감동 없다 말지어다'-<爲尤齋寄題煥章菴, 문곡집 권4>

인용문의 '삼승의 중'은 당시 화양동 환장암의 승려들을 일컫고, 지금의 채운사(彩雲寺) 자리가 당시 환장암 터가 된다. '비례부동' 각자 바로 옆에는 '大明天地 崇禎日月(대명천지 숭정일월)'이 새겨져 있다. 의역하면 '조선 천지는 명나라 것이고, 숭정황제의 日月이 비춘다'는 뜻이다.

같은 노론인 김수항은 '원통한 새 밤새 울고 돌을 갈려지려 하고. 난정에 이르지 못한 물 또한 목매 우네 / 사해를 둘러보니 위아래 거꾸로 되었지만 / 대명의 하늘땅이 이 골짜기에 있어라'(문곡집)라고 대명 의리론의 화양동 송시열을 두둔했다. 우암의 대명의리는 청나라에 대한 북벌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효종의 군사적 북벌과 다른 관념적, 추상적 북벌이었다. [충북일보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