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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읍 남하리 독립운동가 이찬의묘소(曾坪邑 南下里 獨立運動家 李璨儀墓所)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증평군(曾坪郡)

증평읍 남하리 독립운동가 이찬의묘소(曾坪邑 南下里 獨立運動家 李璨儀墓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8. 2. 6. 10:33

 

 

 

 

증평에 있는 민속체험학습장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둔덕마을에 있다고 했다.

고동색깔의 입간판도 마을표지석옆에 붙어 있고 이 근처 어디겠구나 하고 주위를 둘러 봐도 이건 아니다 싶다.

나중에 겨우 겨우 혼자 힘으로 찾긴 했지만 중간에 작은 입간판이라도 하나 더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마음속에 남는다.

 

 

 

 

 

이찬의의 묘지는 남하2리 둔덕마을 뒤쪽에 웃골산이라 불리우는 곳에 있다.

둔덕마을 주민쉼터라는 마을주민들의 쉼터에서 20여미터 오르면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다.

후손들에 의하여 비석이 건립되었으며 무덤에는 호석을 두르고 망주석과 상석을 갖추고 있다.

 

 

 

비석의 전면에는 순국선열이찬의지묘(殉國先烈李瓚儀之墓)라고 음기되여 있으며 비석의 좌우,후면에는 이찬의선생의 행적이 기술되어 있다.

비석은 후손들에 의하여 1985년 3월에 건립하였다.

 

 

 

이찬의(이璨儀 1898~1919)는 독립운동가로 증평사람이다.

청안 장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찬의는 1919년 3월 30일 만세운동이 있었을 때 김수백,이태갑,신강면,장성원,박래명,함재원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청안장터의 독립만세 운동에서

삼천여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경찰주재소와 우편소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서 주동자 여러명이 청안의 경찰주재소로 연행되자 그는 수백명의 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가 투석전을 벌이며

강력하게 항의하며 구금한 사람을 풀어줄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으로 위협을 느낀 일본경찰의 무차별적인 사격으로 인하여 현장에서 일곱명이 죽는 참변이 있었는데

이찬의도 이 때 일본경찰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후손들에 의하면 이찬의가 독립만세운동을 외치다가 일본경찰의 총탄에 맞고 죽었을때의 나이가 39세였다.

증평인 둔터 집에서 청안장터로 깨를 팔러간다고 집을 나설 때 이미 깨를 담았던 자루에 태극기를 넣어갔다고 한다.

이 때 살던 둔덕마을에는 아내와 3살 먹은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이찬의의 묘 밑에 있는 묘가 그의 아들인 이기영의 묘라고 한다.

묘소로 진입하는 곳에 작은 입간판 하나 더 있다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더 하지 않을까 한다.

 

 

 

 

 

 

 

 

 

 

 

 

 

 

독립운동가 이친의선생의 무덤에서 내려다 보이는 둔터마을의 원경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이러한 분들의 땀과 피가 지금의 살기좋은 대한민국을 만드는 초석이 되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