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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읍 내성리 이의장 유허비/신단(曾坪邑 內省里 李義長遺墟碑/神壇)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증평군(曾坪郡)

증평읍 내성리 이의장 유허비/신단(曾坪邑 內省里 李義長遺墟碑/神壇)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8. 2. 7. 11:08

 

 

 

 

 

 

내성리는 전의이씨의 집성촌인 듯 하다.

이의장은 자세한 기록은 찾을수 없지만 무과급제로 하동현감을 지냈다.

이의장의 신단비와 유허비는 증평읍 내성리에 자리하고 있다. 내성리는 삼면이 산으로 싸여 있고 동북방향으로는 트여 있다. 산 사이로 분지가 형성된 지형이다. 자연마을로는 안골, 삼성댕이, 참샘골, 화복골 등이 있다. 안골은 증천리 남쪽 시가지 주변 안쪽에 위치하여 안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의장(李義長)은 증 영의정 전성부원군 이사관( 贈 領議政 全城府院君 李士寬)의 2남으로 하동현감을 지냈습니다.

이 곳 내성리에 신단비와 더불어 유허비가 자리하고 있다.

 

 

 

신단(神壇)이라 함은 신령을 제사지내기 위한 단을 칭합니다

신단비에는 가선대부행하동부삭사부군신단(嘉善大夫行河東府使府君神壇位)와 정부인 연안이씨와  정부인 광산김씨의 신단입니다.

 

 

 

신단옆에는 유허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유허비에는 하동현감전의이공의장유허비(河東縣監全義李公義長遺墟碑)라고 음기되어 있으며 비석의 상태등으로 보아 근래에 후손들에 의하여 건립되었습니다.

유허비라 함은 선현의 자취가 있는 곳을 길이 후세에 알리거나, 이를 계기로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를 칭합니다.

 

 

 

유허란 유지()·유적()·구기()와 같이 ‘남긴 터(자취)’·‘옛터’의 뜻으로, 여기에서는 선현들이 태어났거나 살았거나 임시 머물렀던 곳, 또는 순절()하거나 귀양살이하였던 곳을 가리킨다.

 

고려시대까지는 유허비라는 명칭의 비는 보이지 않으나, 조선시대에는 유허비를 비롯하여 유지비()·구기비()라는 명칭의 비가 적지 않게 조성된다. 경기도 개성에 ‘고려충신정몽주지비()’라는 문구와 입비연대(1530년, 중종 25)만을 간단히 새긴 비는 유허비의 성격을 띤 초기의 예라고 하겠다.

충청남도 홍성군·논산시의 성삼문유허비, 경상북도 경주시의 김유신유허비, 최치원 독서당()유허비, 신라효자 손순()유허비, 제주시의 송시열 적려()유허비와 서귀포시의 정온()유허비 등은 선현들의 출생지·성장지·적거지와 관계하여 세운 비들이다.

또한, 부산의 정발전망유지비(), 전주의 오목대조선태조주필유지비() 등은 선현들이 사망하거나 잠시 머물렀던 곳에 세운 비들이다.

한편, 구기비의 예도 적지 않은데, 황해도 해주의 조선인조탄강구기비, 평양의 기자궁구기비, 함경남도 영흥군의 조선태조탄생구기비, 함흥군의 양성()탄강구기비와 조선태조독서당구기비, 안변군의 신의왕후()탄강구기비, 황해도 곡산군의 신덕왕후사제구기비() 등은 왕이나 왕후의 탄생지 등에 관련하여 세운 비이다.

특히, 구기비라는 용어는 왕족들에게만 한정되어 사용되었던 점이 주목된다. 이와 같이, 유허비·유지비·구기비는 입비 장소가 중시된다는 점에서 지연적 성격이 강하지만, 이를 통하여 선현의 뜻을 기린다는 점에서 송덕의 성격도 강하다.

따라서, 공덕비()·의열비()·정려비() 등과 내용상 크게 구별되지 않으며, 넓은 의미에서는 사실의 내력을 적어 길이 후세에 남긴다는 뜻에서 기적비(·) 또는 사적비()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하겠다. 유허비 [遺墟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의이씨는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현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시조는 이도(李棹)이다.

시조는 고려개국공신인 태사() 도()이며, 그 후손 문의공() 언충()과 효정공() 정간(), 문장공() 혼()의 후손에서 인물이 많이 나와 3대 인맥을 이루었다. 그중 혼은 시조 도의 8세손으로 고려 충선왕 때 첨의정승을 지냈는데, 그의 손자 익()이 예안()으로 분적하여 예안이씨로 불렸으나 근래에 다시 전의이씨와 통합하였다. 언충은 고려 고종 때의 장군 천()의 손자로서 충렬·충선·충숙·충혜왕의 4대에 걸쳐 벼슬한 명신이며 정당문학 예문관 대제학 등을 지냈다.

정간은 천의 현손이며 언충의 재종손으로 조선 세종 때 강원도관찰사를 지내고 노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중추원사(使)에 임명되고 왕으로부터 사연() 및 궤장()을 하사받았다. 또, 죽음에 임박했을 때는 세종이 직접 거둥(;임금의 행차)해 '가전충효 세수인경()' 여덟 자의 어필()을 내렸고, 이후 전의이씨는 모두 이 여덟 자를 가훈으로 삼고 있다. 전의이씨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178명, 상신 5명, 대제학 1명, 청백리 6명, 공신 6명을 배출하였다.  전의이씨[全義李氏]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