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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읍 남하리 남하리사지마애불상군(曾坪邑 南下里 南下里寺址磨崖佛像群)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증평군(曾坪郡)

증평읍 남하리 남하리사지마애불상군(曾坪邑 南下里 南下里寺址磨崖佛像群)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8. 2. 9. 12:52





증평읍 남하히 염실마을 뒷산에 있는 마애삼존불입니다.



1998년 12월 31일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97호로 지정되었다. 남하3리 염실마을 뒤편의 남대산 자락에 위치한 마애불로 2개의 바위에 5구의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원래는 삼존불()만 알려져 오다가 1994년 남하리사지에 대한 정밀조사 과정에서 나머지 2구의 불상이 더 확인되었다. 오랜 풍상을 겪으면서 심하게 부식되거나 훼손된 상태인데 신라시대 말기인 9세기에서 10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른쪽에 있는 큰 바위에는 높이 298cm의 본존()을 중심으로 좌우의 협시불()로 구성되어 있는 삼존불, 같은 바위 왼쪽면에 높이 253cm의 여래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그 왼쪽에 있는 삼각형 바위에는 높이 253cm의 반가사유상()이 각각 조각되어 있다.

본존불 아래 바닥에는 사각형의 우물을 파놓았고 그 주위에 각종 불기()가 놓여 있어 이 마애불이 민김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약 20m 떨어진 곳에는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충북유형문화재 141)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일대가 옛 절터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남하리사지 마애불상군  [南下里寺址磨崖佛像群]






 남하리사지마애불상군(南下里寺址磨崖佛像群) : 1998년 12월 31일에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197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 마애삼존불입상(磨崖三尊佛立像) : 평평한 암벽면의 중앙에 본존입상을 조각하고, 그 좌우에 양협시불을 배치한 삼존불입상이다. 암면에 이끼가 많이 덮여 있고 암질이 좋지 않은데다 균열이 심하여 전체적인 불상의 모습은 어렴풋이 확인되나, 각부의 세부 양식은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양협시불은 본존불과 거의 인접하여 있는데 특히 좌협시불은 10cm 간격으로 두어 가까이 있고 우협시불은 32cm 간격을 두어 약간 떨어져 있어 특이하다. 직사각형에 가까운 암벽 면은 중앙의 본존입상 위쪽이 약간 높아 삼존을 조각하기 알맞은 형태이다. 삼존은 각기 보주형(寶珠形)으로 주변을 얕게 파내어 윤곽을 만든 내부에 낮은 돋을새김으로 조각하였는데, 삼존은 각각 방형의 대좌에 직립한 모습이다. 단 우협시불은 미완성인 듯 대좌를 조각하지 않았다. 중앙의 본존입상은 대좌에 직립한 여래입상으로 원형(圓形)의 두광(頭光)을 갖추었고 각부의 표현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소발(素髮)의 두정(頭頂)에는 위가 뾰족한 보주형(寶珠形)의 육계(肉?)가 표현되어 있고 원만한 상호(相好)에는 눈썹은 나타나지 않으나 두 눈을 지그시 감아 옆으로 길게 치켜뜬 모습이 확인된다. 코는 길게 표현하였으나 각형으로 높지 않으며 입에는 미소의 흔적이 보인다. 귀와 삼도(三道)는 본래부터 조각하지 않은 듯하다. 양 어깨는 당당한 편이며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양 어깨에 걸쳐서 양 팔과 복부 아래로 흘려내려 무릎까지 덮었는데 거의 선각(線刻)에 머물고 있으나 흉부 이하 무릎에 걸쳐서는 U자형의 의문(衣文)과 그 아래의 3, 4조의 수직선문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수인(手印)은 앞의 조사 보고에서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오른손은 오른쪽 어깨 밑에서 외장(外掌)한 시무외인(施無畏印)이고 왼손은 겨드랑 밑에서 손가락을 모두 펴서 아래로 향하도록 외장(外掌)한 여원인(與願人)으로 확인되어 통인(通印)을 결하였음이 밝혀졌다. 법의 자락 끝으로 두 발이 노출되어 있으나 발가락 등의 세부적인 조각은 생략되었다. 방형의 대좌는 소형으로 연판(蓮瓣) 등의 장식이 전혀 없고 윗면에 불상의 양쪽 발에 붙이어 양각하였다. 우협시불은 삼존 가운데 조각이 가장 얕게 돋을새김으로 표현되었고 마멸도 심하여 전체적으로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두부에서 어깨까지는 약간의 선각이 남아 있으나 가슴 이하의 부분은 두신(佛身)의 외곽만 겨우 확인할 수 있는 정도이다. 소발(素髮)의 머리에는 낮은 육계가 표현되었으나 마멸이 심하고 암벽의 균열로 인하여 잘 보이지 않는다. 원만형(圓滿形)의 상호(相好)에는 지그시 감은 모습을 가는 손으로 표현한 두 눈이 보이며 코는 마멸이 심하고 입은 굳게 다문 모습이 일부 남아 있다. 양 옆의 귀와 목의 삼도(三道)는 본래부터 표현되지 않은 듯하며 어깨는 당당해 보인다. 법의(法衣)는 뚜렷하지 않은데 양쪽 옆구리에서 물고기의 지느러미와 같이 길게 빼어 늘어진 옷자락이 보여 통견(通肩)이 아닐까 추정된다. 이밖의 다른 문양은 보이지 않고 발끝이나 대좌의 조각도 생략되었다. 좌협시불은 왼쪽 어깨 위와 허리 부분이 파손되어 떨어져나갔으며 두부를 제외한 조각이 불분명하다. 상호(相好)는 비교적 완전한 편으로 소발(素髮)의 두정(頭頂)에는 낮은 육계가 있다. 안면부에는 가는 눈썹과 감고 있는 두 눈의 표현이 보이고 코가 길게 나타나 있으나 입은 마멸로 뚜렷하지 않다. 양 옆의 귀와 목의 삼도(三道)는 조각되지 않았다. 어깨는 본래 당당했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 왼쪽 어깨가 파손되어 있다. 법의(法衣)의 착용과 의문(衣文)은 복부 아래에 U자형이 일부 남아 있을 뿐 현재 거의 알 수 없다. 옷자락 하단부 밑에는 두 발을 약간 벌리고 서있는 모습과 방형의 대좌가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 본존불보다 대좌의 높이를 약간 낮게 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마애삼존불입상은 각부의 손상과 마멸이 심하여 조각 기법을 살펴보기에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삼존불 모두에서 나타나는 원만하고 자비로워 보이는 상호의 어깨의 당당함, 그리고 우협시불의 지느러미와 같이 양 옆으로 퍼지면서 길게 늘어진 옷자락의 표현 등에서 고식의 작풍이 엿보여 주목된다. 이러한 조각 수법을 볼 때 조성 연대는 고려시대보다는 이른 통일신라 말기, 즉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의 마애불로 추정되고 있다. 실측치는 본존불입상 전체 높이 298cmㆍ두광 지름 86cmㆍ머리 높이 51cmㆍ육계 높이 14cmㆍ육계 너비 19cmㆍ얼굴 너비 42cmㆍ눈 길이 10.5cmㆍ코 길이 20cmㆍ입술 너비 13cmㆍ어깨 높이 221cmㆍ대좌 높이 31cmㆍ부조 높이 6.5cm이다. 중앙 본존불입상의 아래쪽 바닥에는 불상의 암벽 면에 붙여 방형 샘을 파 놓았으며, 주위에는 향촉대(香燭臺)와 불발(佛鉢) 등의 불기(佛器)들이 놓여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샘을 약수로 부르며 여기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이 샘물을 이용하여 공양을 드리고 식수로도 사용한다. 크기는 가로 94cmㆍ세로 68cmㆍ깊이 68cm이다




남하리사지마애불상군의 가치 : 남하리사지마애불상군은 충북 지방에서는 그리 많지 않은 삼존불과 반가상의 형식을 비롯하여 여래입상을 한 곳에 집중한 마애불상군으로 주목된다. 충북의 삼존불로는 이 사지에서 가까운 청원군 내수읍 비중리에 일광삼존석불(一光三尊石佛)이 있고 괴산군 청천면 낙영산(落影山) 정상부에 마애삼존불입상이 있다. 특히 비중리의 일광삼존석불은 6세기 후반에 조성된 삼국시대 불상으로서 이 지역에 들어온 불상 조각의 초기 양식을 보여 주어 남하리사지의 마애삼존불 조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중앙 본존불이 취하고 있는 통인(通印)의 수인(手印)은 비중리 일광삼존석불의 본존상이나 비중리 석조여래입상의 수인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마애반가사유상은 증원군 가금면 봉황리 마애불상군 중의 반가상과 서로 통하는 자세로 보이나 파손이 심한 관계로 정확한 조각 수법을 알 수 없다. 삼존불과 여래입상, 반가상 등 이곳에 있는 5구의 마애불상은 모두 원만하고 자비스러운 모습의 상호와 당당한 체구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목에는 삼도(三道)가 역시 모두 생략되어 이 불상들이 거의 동시대 작품으로서 지역적 특성을 나타내 준다. 이러한 모습들은 인근의 남하2리[미륵당]에 있는 석조여래입상이나 미암리의 석불 또는 도안면 광덕리의 광덕사(光德寺) 석조여래입상에서 비슷하게 보이고 있다. 이 남하리사지의 앞을 지나는 증평-미원 간 지방도는 지금도 통행량이 많은 편이다. 역사지리적인 면에서도 경북의 상주에서 화령을 넘어 보은-창리-미원-구라산성-초정-증평-진천-죽산-안성-이천-한양으로 통하는 지름길로, 청주의 동부 지역을 비껴가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이러한 지리적 중요성은 이 교통로를 따라 구축된 많은 성곽들을 통하여 입증되며 불교 유적 또한 적지 않게 발견된다. 남하리사지의 마애불상군에서 신라시대 불교미술 전성기의 작풍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지리적 환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통일신라 말기에 조성된 마애불로서 조각 기법의 지역적 특성도 많이 엿보이는 것은 신라 하대의 지방호족 세력의 발흥과 지역문화 역량의 발전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마애삼존불에는 에전부터 인근의 사람들에게는 탑바우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바위가 병풍처럼 겹겹히 되어있고 바위밑에는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었다. 삼층석탑과 더불어 마애불이 조각된 바위가 있어 탑과 바위를 한꺼번에 일컬어 탑바우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바위에 와서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못 낳는 사람도 아들을 얻는다 하여 인근 아녀자들이 와서 치성을 드린다고 한다.그래서 이곳에 와서 빌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아들바우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마애불을 찾는 날은 마애불밑에 샘은 말라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