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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읍남하리사지마애불상군(曾坪邑南下里寺址磨崖佛像群) 본문
삼존불이 조각된 동일 암반의 북쪽 면에 부조된 불상이다. 남대산으로 오르는 길에 인접해 있어 하단부는 땅 속에 매몰되어 있다. 길가에 있어서인지 인위적인 손상을 가장 많이 입었으며 특히 눈과 코는 마멸이 심하다. 그리고 바위의 균열도 심하여 무심코 지나치면 불상이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희미한 상태이다. 마애불상을 부조한 암면이 거칠어 입상의 주변 윤곽을 음각으로 파내고 조각하였다. 바위의 면이 고르지 않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불상의 각부 양식을 확인할 수 있다. 불상의 머리는 소발이고 정수리의 육계는 암벽의 균열과 마멸로 손상이 심하다. 상호는 원만한 편이나 안면부의 눈, 코, 입, 귀는 인위적인 손상을 당하여 움푹 패여 있다. 입가에는 미소의 흔적이 어렴풋이 나타나 있고 머리 둘레에는 보주 모양의 두광이 굵은 음각선으로 표현되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없어 짧아 보이지만 어깨가 당당하고 전체적으로 듬직한 체구라 할 수 있다. 법의(法衣)는 우견편단(友肩偏袒)으로 가슴 앞에는 왼쪽 어깨에서 대각선으로 내려진 옷 주름선이 굵게 나타나 있고 허리에도 유려하게 흘러내린 옷자락의 선이 희미하게 보인다. 수인(手印)은 양 손을 가슴 앞에서 합장(合掌)한 것처럼 보이나 마멸이 심하여 확인이 어렵다. 무릎 이하의 부분은 현재 매몰되어 있어 세부 양식을 살펴볼 수 없다. 원만한 형태의 안면부와 입가의 미소, 그리고 보주형의 두광과 당당한 체구에서 신라불상의 양식이 강하게 느껴지며, 조성 시기는 대략 동측면의 삼존불과 같은 시기인 통일신라 말의 9세기 말 내지 10세기 초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실측치는 전체 높이 253cmㆍ두광 지름 86cmㆍ머리 높이 42cmㆍ머리 너비 37cmㆍ육계 높이 12cmㆍ육계 너비 16cmㆍ코 길이 19cmㆍ귀 길이 24cmㆍ어깨 높이 169cmㆍ어깨 너비 70cmㆍ부조 높이 3.5cm이다. ㉢ 마애반가사유상(磨崖半跏思惟像) : 삼존불이 조각된 바위의 남측 앞에 있는 정면 삼각형의 암반 북측 면에 선각된 불상이다. 암벽 면은 편편한 편으로 불상을 조각하기에 적당한 크기이나 북향으로 되어 있어 항상 그늘이 지는 곳이다. 암벽 면을 전혀 다듬지 않고 선각(線刻)으로만 반가형의 불상을 조각하였는데 본래부터 얕게 음각한데다 마멸이 심하여 현재 불신(佛身) 상체의 윤곽선과 대좌 하단부의 연판(蓮瓣)이 겨우 확인될 뿐이다. 불상은 대좌에 걸터앉은 자세로 상체를 오른쪽으로 약간 굽히고 오른 팔꿈치를 무릎에 올려놓은 후 손등은 얼굴로 향하고 있어 반가사유상의 모습을 나타내준다. 안면부와 불신부의 세부 모습은 전혀 알아 볼 수 없으나 몸을 오른쪽으로 약간 돌린 자세이다. 하체는 오른쪽 무릎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어서 양 발의 형태는 알 수 없고 대좌 역시 하단에 선각으로 나타낸 5엽의 연판이 겨우 보인다. 이 마애반가사유상은 미완성의 작으로 보이기도 하여 조성 연대를 밝히기는 현재 상태로 어려우나 옆에 있는 삼존불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볼 때 삼존불보다는 약간 늦은 시기에 조각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실측치는 전체 높이 211cmㆍ불신 높이(무릎 이상) 114cmㆍ불신 너비 75cmㆍ머리 높이 37cmㆍ머리 너비 32cmㆍ연판 길이 20cmㆍ연판 너비 15cm이다. ㉣ 남하리사지마애불상군의 가치 : 남하리사지마애불상군은 충북 지방에서는 그리 많지 않은 삼존불과 반가상의 형식을 비롯하여 여래입상을 한 곳에 집중한 마애불상군으로 주목된다. 충북의 삼존불로는 이 사지에서 가까운 청원군 내수읍 비중리에 일광삼존석불(一光三尊石佛)이 있고 괴산군 청천면 낙영산(落影山) 정상부에 마애삼존불입상이 있다. 특히 비중리의 일광삼존석불은 6세기 후반에 조성된 삼국시대 불상으로서 이 지역에 들어온 불상 조각의 초기 양식을 보여 주어 남하리사지의 마애삼존불 조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중앙 본존불이 취하고 있는 통인(通印)의 수인(手印)은 비중리 일광삼존석불의 본존상이나 비중리 석조여래입상의 수인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마애반가사유상은 증원군 가금면 봉황리 마애불상군 중의 반가상과 서로 통하는 자세로 보이나 파손이 심한 관계로 정확한 조각 수법을 알 수 없다. 삼존불과 여래입상, 반가상 등 이곳에 있는 5구의 마애불상은 모두 원만하고 자비스러운 모습의 상호와 당당한 체구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목에는 삼도(三道)가 역시 모두 생략되어 이 불상들이 거의 동시대 작품으로서 지역적 특성을 나타내 준다. 이러한 모습들은 인근의 남하2리[미륵당]에 있는 석조여래입상이나 미암리의 석불 또는 도안면 광덕리의 광덕사(光德寺) 석조여래입상에서 비슷하게 보이고 있다. 이 남하리사지의 앞을 지나는 증평-미원 간 지방도는 지금도 통행량이 많은 편이다. 역사지리적인 면에서도 경북의 상주에서 화령을 넘어 보은-창리-미원-구라산성-초정-증평-진천-죽산-안성-이천-한양으로 통하는 지름길로, 청주의 동부 지역을 비껴가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이러한 지리적 중요성은 이 교통로를 따라 구축된 많은 성곽들을 통하여 입증되며 불교 유적 또한 적지 않게 발견된다. 남하리사지의 마애불상군에서 신라시대 불교미술 전성기의 작풍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지리적 환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통일신라 말기에 조성된 마애불로서 조각 기법의 지역적 특성도 많이 엿보이는 것은 신라 하대의 지방호족 세력의 발흥과 지역문화 역량의 발전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ㆍ남하리석조미륵보살입상(南下里石造彌勒菩薩立像) : 남하리석조미륵보살입상은 증평 시가지에서 청원군 내수읍 초정리 방면으로 가다보면 남하2리 ‘미륵당’ 133-5번지의 논과 밭 사이 공터에 있다. 불상 3구가 마을을 바라보며 북쪽을 향하여 나란히 세워져 있다. 동쪽의 가장 큰 불상은 2001년 7월 13일에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208호로 지정되었다.. 이 불상은 현재 아랫부분이 땅 밑에 묻혀 있어 정확한 크기를 알 수 없으나 지면 위에 노출되어 있는 부분만 하더라도 350cm에 이른다.. 불상의 주변에서 약간의 기와편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대략 고려시대의 절터로 추정되는데, 이 절터에 대한 문헌기록은 없다. 불상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오랜 세월을 노천에서 풍우에 시달려 전체적으로 약간의 마모가 있다. 석질이 약화되기는 하였으나 각부의 조각 양식은 거의 원형대로 잘 남아 있는 편이다. 머리에는 관대가 있는 비교적 높은 보관(寶冠)을 썼는데, 두 귀 위에 장방형의 홈이 있어 보관에 장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크고 원만한 상호에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으며, 이마의 눈썹 사이로 백호(白毫)가 양각되어 있다. 두 귀는 길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었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배 위에 붙여 외장(外掌)하고, 왼손은 가슴 앞으로 올려 연꽃을 잡고 있다. 옷 무늬의 조각 양식이나 수법 및 규모의 장대함 등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 초기[10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왼쪽에 있는 2구의 작은 불상들은 현 위치가 본래의 자리가 아니라 마을 안쪽에서 옮겨 왔다고 전해진다, 마모가 매우 심하여 불상의 형태도 불분명하고. 근래 시멘트로 보수하여 얼굴 등 원형을 크게 상실하였다. 마을 사람들의 구전에 의하면, 예전 이곳에서 가까운 절에 보살이 있었는데 자신의 절이 미륵불 때문에 번창하지 못한다고 오해하고 이 불상들을 넘어뜨려 오랫동안 쓰러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1949년에 속리산 법주사의 윤월인(尹月印) 스님이 이 마을 뒤편 골짜기에 성주사(聖住寺)라는 절을 짓고 마을 주민들의 협조로 쓰러진 불상을 일으켜 세웠으나 보관(寶冠)은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 작은 불상들은 ??허리잘린미륵??으로 불리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옛날 이곳에 큰 부자자가 살았다. 그런데 그가 축적한 부는 악독한 방법을 동원해서 얻은 것이었다. 게다가 부를 축적하면 할수록 더욱 인색해졌고, 욕심 또한 날이 갈수록 심했다. 그런데 그 집의 하인 역시 주인을 닮아 인색할 뿐 더러 심술궂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노승이 부자에게 시주를 요청했다. 어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부자는 아는 체하지 않았다. 그리고 계속 울리는 목탁 소리가 시끄러워 하인을 시켜 노승을 쫓아 버리도록 했다. 이에 하인은 빗자루를 들고서 ??우리 주인 나리께서 시끄럽다고 하신다. 딴 데로 가라!??하며 스님을 내목았다. 그러자 노승도 ??소승은 시주을 받을 때까지 가지 못하겠습니다.??하며 완고하게 맞섰다. 이에 주인이 ??거름이나 한 삽 떠 주어라??라고 말하자, 하인은 시키는 대로 거름을 바랑에 퍼 주었다. 노승은 아무 말 없이 거름을 받고는, ??시주를 했더라면 더 큰 부자가 될 방법을 가르쳐주려 했건만......??하며 아쉬운 낯빛을 띠었다. 하인이 노승의 말에 솔깃해 더 큰 부자가 되는 방법을 물어 보았다. 노승은 ??저기 미륵이 부잣집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이 정도의 부밖에 축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저 미륵의 허리를 자르면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며 넌지시 비법을 전해 주었다. 하인은 이 사실을 주인에게 알렸다. 주인은 곧바로 미륵의 허리를 잘라버렸다. 그런데 미륵의 허리를 자르자 하늘에서 느닷없이 벼락이 내리쳤다. 또한 미륵의 허리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러 나왔다. 미륵의 피가 흘러내려 내〔川〕가 생길 정도였다. 부자는 이후에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이 그만 망하고 말았다(충청북도ㆍ증평군ㆍ(사)충북향토문화연구소,2008:229~230)
중앙에 본존불과 좌우에 보살을 조각한 1면이 있고 그 암반의 북면에 여래입상이 별도로 새겨졌다. 삼존불이 있는 바위의 남쪽 앞 정면 삼각형의 바위에는 한쪽 다리만 올리고 생각하는 자세로 앉아 있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다.
마애불상군의 전체 높이는 1.14∼2.98m이며, 본존불의 높이는 2.98m, 여래입상의 높이는 2.53m, 반가사유상의 높이는 2.53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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