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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동면 마산리 정석오 묘지(孟洞面 麻山里 鄭錫五 墓地)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음성군(陰城郡)

맹동면 마산리 정석오 묘지(孟洞面 麻山里 鄭錫五 墓地)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8. 5. 2. 21:54

 

 

 

맹동면 마산1리를 접어들면 동네를 감싸고 있는 얕은 야산에 무덤이 보인다.정석오의 무덤이다.

정석오의 무덤옆으로는 정양순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옆으로는 동래정씨의 가족묘원이 자리하고 있다. 

 

 

정석오는 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문신이다.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유호(攸好), 시호는 정간(貞簡). 정혁선(鄭赫先)의 아들이며 진주목사를 지낸 정동협(鄭東協)은 정석오의 손자이다. 정석오는 1715년(숙종 41)에 식년문과 병과로 급제한 후 검열·문학을 거치고 경종이 즉위하면서 부수찬·교리를 지냈다. 1721년 30세 때 지평으로 김일경(金一鏡)과 함께 노론 사대신(四大臣)을 논척하여 유배가도록 했으나 4년 후 소론의 실각으로 삭직당했다. 1727년(영조 3) 정미환국으로 사간에 복직되고 승지를 거쳐 1736년 등극진하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도승지·호조판서를 거쳐 1746년 55세에 우의정으로 승진하였다. 이어 좌의정이 되었으나 김양택의 상소로 사직되었다. 1748년(영조 24)에 영돈녕부사로서 동지사겸사은사가 되어 효현황후의 시호를 올린 것을 진하하고, 공물을 바치기 위해 청나라로 가는 도중 십리보(十里堡)에서 병사하였다. 묘소는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마산리에 있으며 묘역은 약 200여 평으로 상석과 망주석·문관석이 있으며 조명교(曺命敎)가 짓고 조윤형(曺允亨)이 쓴 묘갈이 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며, 신도비(神道碑)가 내려졌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마산리 마을로 들어서면 멀리 마신1리를 감싸고 있는 야산밑으로 자리하고 있는 묘지가 보인다.정석오의 묘지가 보인다.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마산리에서 전해 내려오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고향으로 돌아온 이야기.


「정석오의 혼」에 나오는 정석오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십리보에서 죽었다고 한다. 음성군 맹동면 마산리 뒤편에 정석오의 묘소가 있다.음성군 맹동면 마산리에서 채록하여, 1982년에 출간한 『내고장 전통가꾸기-음성군-』에 수록하였다. 『음성의 구비문학』과 『음성군지』에도 실려 있다.

 

 

 

 

1748년(영조 24) 영돈녕부사로 동지겸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갔던 정석오가 십리보에서 갑작스레 병사하였다. 서장관 이이장은 슬픔을 누르고 정석오의 시체를 고국으로 운구할 준비를 하였다. 귀국을 앞둔 전날 밤이었다. 이이장의 방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어서 문을 열었더니, 뜻밖에도 세상을 떠난 정석오가 의관을 정제하고 들어왔다.

이이장이 놀라서 맞이하자 정석오가, “이공, 내가 타국에서 죽고 보니, 이대로 있으면 육신은 돌아갈 수 있으나 혼령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될 것 같소. 소상하게 말할 수는 없으나, 내 영혼이 고국으로 돌아가려면 이공의 도움이 꼭 필요하오. 강을 건널 때마다 내 이름을 세 번씩 불러주오. 그러면 나는 이공의 어깨를 타고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소.” 하였다. 이이장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자 정석오는 희색이 만면하여 밖으로 나갔다. 이이장이 배웅을 할 양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눈을 떠보니 꿈이었다. 꿈은 꿈인데 이상하게 생생한지라 이이장은 ‘참 이상한 일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다음날 아침, 이이장은 동행들과 함께 정석오의 관을 마차에 싣고 십리보를 떠났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른 때와는 다르게 어깨가 묵직한 것이 느껴졌다. 그리하여 이이장은 크고 작은 강을 건널 때마다 정석오가 꿈에서 부탁한 대로 하늘을 향해서, “정석오! 정석오! 정석오!” 하고 세 번을 불렀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나 여기 있네.” 하는 정석오의 대답이 들려왔는데, 그 소리는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강을 건널 때마다 이이장은 정석오를 불러서 대답을 들으며 혼령이 동행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의주의 압록강을 건너고 대동강과 임진강을 건너면서부터는 이이장의 어깨가 점점 더 가벼워지더니, 한강을 건너자 “이공, 고맙소. 나 다 왔소.”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가 완전히 가벼워졌다. 이이장은 한양으로 들어온 뒤 조정에 들어가 당시 돈녕부참봉으로 사관하고 있던 상주 정양순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정석오의 혼령이 돌아왔음을 증언하였다. 이 이야기는 항간에 큰 화제가 되었으며, 그후 한산이씨인 이이장의 후손과 정석오의 후손은 서로 통혼하여 우의의 돈독함이 후대까지 이어져 내려온다고 한다.

 

 

「정석오의 혼」의 중심 모티프는 죽은 사람의 소원을 산 사람이 들어주는 ‘해원(解寃)’이다. 보통 죽은 영혼이 등장하는 옛이야기들은 억울하게 죽어서 귀신이 되었다가 원한을 푼다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지만 「정석오의 혼」은 병사(病死)하여 귀국할 수 없는 영혼의 귀향을 살아 있는 사람이 돕는다는 내용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정석오의 묘가 있는 마산리는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에 속하는 행정리이다.
마운동과 매산리의 이름을 합쳐 각 한자씩 따서 현재의 이름이 되었다.


본래 충주군 맹동면 지역이었으나 1906년에 음성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마운동·신평리·매산리와 하본리·봉암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음성군에 편입되었다. 구밤까실에서 봉현리로 넘어가는 곳에는 세곡고개(세곡), 신평에서 쌍정리로 넘어가는 곳에는 마산고개, 새터에서 봉현리로 넘어가는 곳에는 새터고개 등이 있다. 마산천은 마산리 58-2번지에서 마산리 530번지로 흘러 양촌천으로 유입되고 있다. 새터 쪽에는 당앞뜰이 있고 서북쪽에 덕골구레, 동쪽에 새터구레 등의 골짜기는 전답으로 이용되고 있다. 새터 서남쪽에는 용머리들이 있고 동쪽에는 용머리방죽이 있다. 밤까실의 동쪽에는 증뱅이구레 골짜기가 있고 1942년에 축조된 증뱅이 소류지가 있다.


맹동면의 북쪽에 위치하며, 2007년 10월 1일 기준 면적은 2.42㎢이고, 2011년 8월 31일 현재 총 112세대에 284명(남자 150명, 여자 134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은 인곡리, 서쪽은 본성리, 남쪽은 쌍봉리, 북쪽은 금왕읍 삼봉리와 각각 접하고 있다. 경지 면적은 밭이 0.29㎢, 논이 0.68㎢ 등이며, 농가 호수는 60호로서 주민의 대부분이 벼농사를 위주로 경작하지만 사과 등의 과수 재배를 하는 농가가 맹동면 내에서 가장 많다. 1978년에 공동축사가 건립되었고 마운동과 새터 등에는 1977년에 각기 마을회관이 건립되었다.

주요 기업체로는 건축 자재를 생산하는 (주)헌터더글라스 코리아가 있다. 자연 마을로는 1970년대 말까지 구밤까실·밤까실·매산·새터·신평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마산1리에 밤까실(율기동·율지동 또는 마운동), 마산2리에 매산·신평·새터(신기) 등이 있다. 문화 유적으로는 밤까실에 조선 영조 때 호조판서를 거쳐 1746년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을 지낸 정석오(鄭錫五) 묘가 있다. 주요 도로로는 지방도 515번이 마을의 남쪽을 동서 방향으로 지나고 있으며, 면리도 214번이 마산리의 마을에 연결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