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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백면 평산리 남지 묘소(文白面 平山里 南智 墓所)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진천군(鎭川郡)

문백면 평산리 남지 묘소(文白面 平山里 南智 墓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8. 6. 9. 08:51

 

 

 

 

문백면 평산리 안능마을에 있는 의령남씨의 재실인 충간재 뒷쪽으로 남지의 묘소와 부인인 전의이씨묘소 그리고 남지의 신도비가 자리하고 있다.작은 소로길을 따라 3분여 진입하면 남지부인인 전의이씨의 묘소가 보이고 남지의 묘와 함께 신도비를 볼수있다.

 

 

 

남지는 조선 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문신이다.
본관은 의령(宜寧). 할아버지는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영의정 충경공 남재(南在)이며, 아버지는 병조의랑을 지낸 남문경(南文景)이다. 아들로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남윤(南倫), 손자로 남흔(南忻)과 남칭(南稱)을 두었다.


남지(南智)[1400~1452]는 17세인 1425년(세종 7) 음보로 사헌부감찰이 되었으며, 그 후 경상도관찰부 경력에 임명되었다. 이때 하연(河演)이 관찰사로 남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 사람이 나이가 젊고 문벌이 높은 집의 자제로 직무를 옳게 보지 못할 것이니 내 장차 어찌 할꼬”라며 걱정하였다. 남지가 들어와 인사를 하자 하연은 시험을 하기 위해 판단하기 어려운 공사(公事) 문서를 주면서 처결하라 하였다. 남지는 이튿날 한 번 훑어보고는 손톱으로 그어 표시를 하여 주면서 “아무 글자는 빠졌으니 아마 그릇된 것이요, 아무 일은 그릇되었으니 분변해야겠습니다”라고 말해 하연을 놀라게 하였다. 그 뒤부터 하연이 남지를 간곡하게 대하였다고 한다.중앙으로 돌아와 사헌부지평이 되었으며, 이때 도승지 조서로(趙瑞老)가 친족을 간음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아무도 이를 발설하는 자가 없었는데 담력과 뜻이 있는 남지가 피의자를 미리 잡아다 놓고 조서로가 조회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문초하여 사실을 실토하게 하였다. 세종이 간음범을 중하게 처리하였으므로 조서로는 서인이 되었다.1435년(세종 17) 형조참판으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사헌부대사헌·경상도관찰사·형조판서·호조판서를 지냈다. 1449년(세종 31) 우의정에 올랐으며, 1451년(문종 1) 좌의정이 되었다. 이때 세종에게서 영의정 황보인(皇甫仁)·우의정 김종서(金宗瑞)와 더불어 병약한 어린 단종을 잘 보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러나 그해 풍병(風病)으로 몸이 마비되어 정사를 볼 수 없게 되면서 좌의정에서 물러났다. 딸이 안평대군의 아들 이우직(李友直)에게 출가하였는데,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안평대군 부자가 화를 당하였을 때 풍질(風疾) 때문에 위기를 피했다.묘소는 진천군 문백면 평산리 양천산에 있다.

 

풍질때문에 세조 칼을 모면- 진천 남지 - 충북과 나의 연결고리 '충북일보' (inews365.com)

 

풍질때문에 세조 칼을 모면- 진천 남지

조선초기 남지(南智·?~1453)라는 인물이 명나라로부터 '음주자치통감'(音註資治通)이라는 역사책을 갖고 왔다. 이 책은 글자 그대로 사마광이 지은 자치통감을 주석(註釋), 즉 낱말이나 문장을 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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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군(宜成君)에 봉해졌고, 손자인 남흔(南忻)의 상소가 받아들여져 충간(忠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8세손인 영중추부사 남구만(南九萬)[1629~1711]이 찬(撰)한 신도비가 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