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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백면 옥성리 석불좌상(文白面 玉城里 石佛坐像) 본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옥산리(玉山里)의 ‘옥(玉)’자와 두성리(豆城里)의 ‘성(城)’자를 따서 옥성리(玉城里)라 하였다.
청주와 가까워서인지 옥성리에도 변화의 바람이 많이 분다. 동네옆을 지나는 도로도 훤하고 이쁘게 단장된 전원주택들도 자리를 잡고 옥성리 석불좌상을 찾기가 어리어리하다. 허기사 내 기억이 어리어리 할테지 옥성리 석불좌상은 항시 그자리 일텐데.
언제나 봐도 참 손의 모양이 아이들의 손모양인 듯 이쁘기도 하다.
옥성리 석불좌상은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옥성리에 있는 조선시대 석조 불상이다. 옥성리 석불좌상은 진천군 문백면 옥성리 429번지 느랭이마을에 있으며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106㎝ 높이의 옥성리 석불좌상은 마멸이 심하여 전체적으로 판별하기가 쉽지 않다. 불두의 나발(螺髮)이나 육계(肉髻)·백호(白毫) 부분의 구분이 어려우며, 상호(相好)의 눈·코·입·귀가 모두 마멸되어 윤곽조차 나타나지 않는다. 이마 부분의 희미한 선도 얼굴의 구분이 되지 않아 보관인지 나발인지 알 수 없다. 불신의 목 아래 선도 삼도인지 영락(瓔珞)을 단 목걸이 줄인지 판독이 되지 않는다. 조각 수법이 조잡하고 불신의 자세도 자연스럽지 않다. 불신의 무릎 아래는 땅속에 묻혀 있다. 다만 광배에는 신광(身光)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2~3줄의 외곽선이 둘러지고 그 옆에는 소략하게 불꽃 무늬가 조식되어 있으며, 오른손의 수인과 손의 형태로 보아 약사여래좌상임을 확인할 수 있다.
옥성리 석불좌상은 전체적으로 마멸이 심해 불상의 세부 모습은 살펴볼 수 없지만 불신의 배경이 되는 광배의 전체 모습이 남아 있어 멸실된 다른 불상들의 광배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마을에서 700여미터 떨어져있는 옥성리사지와 연관되어 석불좌상을 생각해 볼수도 있다. 지금은 동네주민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관리되어지고 있다.
옥성리 절터의 주변이 모두 논으로 경작되고 있어 유구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절터에 대한 조선시대 이전의 문헌 기록은 없으나 일제강점기에 편찬된 『상산지(常山誌)』에 의하면, “높이 5장이나 되는 오층석탑과 그 옆에 작은 암자와 석불이 있는데,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으며 절은 이미 철폐되어 탑과 불상만이 홀로 남아 있다. 또 그 옆에는 강당 터가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고려시대 향촌의 자제들을 교육하던 곳으로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기록에서 높이가 5장이라 한 것은 1980년대 초까지 남아 있던 석탑의 상태로 보아 조금 과장되었거나, 당시에는 석탑의 각부가 모두 완전하게 남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기록을 참고해 보면, 사찰이 폐사된 후 서당과 같은 교육을 목적으로 한 강당이 있었으리라고 추측된다.
석조보살좌상은 기존에 석조약사여래좌상으로 보고되었지만 형태로 볼 때 불상이 아닌 보살상으로 판단된다. 보살상은 산57-3번지 민묘 석축 앞에 하부가 일부 매몰된 채 남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보살상은 현재 높이 99㎝, 전체 너비 90㎝, 전체 두께 33㎝의 반타원형 판석에 광배와 함께 부조되었다. 세부 크기는 머리 높이32.5㎝, 머리 너비 30.5㎝, 어깨 너비 51.5㎝, 가슴부 두께 4.5㎝, 두광 직경 50㎝이다. 머리 위에는 높이 5㎝의 보관을 쓰고 있으며, 보관대가 확인된다. 얼굴은 방형으로 눈, 코, 입은 심하게 마멸되어 윤곽조차 확인되지 않는다. 귀는 가늘고 짧은 편이다. 목에는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다. 착의법은 가슴에서 곡선의 옷주름과 왼쪽 어깨에서 사선 방향으로 내려온 옷주름이 확인되지만 심하게 마멸되어 정확히 알 수 없다. 왼손은 아래로 내려 손가락을 모두 폈으며, 왼손은 가슴부에서 둥근 지물을 쥐고 있다. 하부는 매몰되어 무릎의 형태는 알 수 없으나 작은 양 발이 확인된다. 광배는 보살상 외곽을 편평하게 치석한 후 1줄의 양각 선으로 두광을 표현하였고, 그 주위에는 간략화된 화염문을 측면에 걸쳐 조각하였다. 배면에는 별다른 조각이 보이지 않는다. 보살상 앞에는 근래에 조성한 방형 배례석이 있다. 조성시기는 고려후기로 추정된다.[한국의 사지발췌]
옥성리 사지탑에 대한 글이 있어 옮겨왔다
현재는 도난당하여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으나, 옥성리 절터를 1963년 처음으로 조사한 정영호 교수의 글을 전재하면 다음과 같다.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옥성리 옥산 부락에서 골짝으로 약 1㎞쯤 올라가면 노변 밭둑에 삼층석탑과 석불좌상이 유존한다. 주위 밭에 와편이 산란한 점으로 보아 이 일대가 사지로 추정되며 탑상도 현재 원위치는 아니나 이 사지의 유품에는 틀림없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곳에서 약 4㎞쯤 더 올라가면 또 한 곳에 사지가 있고 와편이 산재한다고 하는데 앞으로의 조사가 주목된다. 석탑은 도괴(倒壞)되었던 탓인지 각부에 파손이 많고 탑재가 놓인 순서도 바뀌어졌으며 결실된 부분도 있다. 옥개석은 삼층이 다 구비되었으나 탑신은 2층 한 층만이 남아 있다. 옥개의 받침은 사단식이며 낙수면은 급경사를 이루었고 전각에 반전이 있으나 둔후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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