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단성면 하방리 탁오대암각자(丹城面 下坊里 濯吾臺岩刻字)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단양군(丹陽郡)

단성면 하방리 탁오대암각자(丹城面 下坊里 濯吾臺岩刻字)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8. 8. 23. 09:34

 

 

 

 

단양군수를 지낸 퇴계 이황이 단양천변에 있는 바위에 예서(隷書)로 새긴 것이다.

원래는 우화교 아래에 있던 것을 충주댐 건설로 인하여 단성면 하방리 수몰이주기념관 정원으로 옮겼다.

‘나를 씻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보아 이황이 이곳에서 심신을 가다듬은 것으로 짐작된다. 암각자의 크기는 가로 49㎝, 세로 17㎝이다.

탁오대의 어원은 중국 굴원의 어부사에서 유래한 말로서

창랑지수청혜 가이탁오영 (滄廊之水淸 可以 濯吾纓)

창랑지수탁혜 가이탁오족 (滄廊之水濁 可以 濯吾足)

 "흘러가는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흘러가는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는다"에서 탁오(濯吾)를 땄고 장소라 하여 대(臺)자를 썼다고 한다.

 암각자는 높이 4m, 둘레 약 13m나 되는 자연 암석 중앙 우측 부분에 각자하였다.충정북도 유형문화재 81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암각내용 : 濯吾臺(탁오대)

 

 

 

이황은 명종 3년(1548)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단양향교를 현재의 자리로 옮기고, 백성들을 가르치는데 힘을 쏟았다. 이황의 선정을 입은 군민들은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거사비를 세웠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단암서원을 세워 그를 기려왔다. 이황은 학문에 대한 식견과 덕행이 높아 학문 연구와 후학양성에 힘쓰는가 하면, 틈만 나면 자연을 찾아 그 아름다움에 도취할 줄 아는 도인이기도 했다. 지금도 단양팔경 곳곳에는 선생의 자취가 남아 있다. 단성면 단양수몰이주기념관 앞에 있는 탁오대(濯吾臺)는 원래 단성면 남쪽의 우화교에서 상류 선암계곡 쪽으로 200m 지점에 있었다.

이황 선생이 단양군수로 있을 때, 나랏일을 보다 피곤하면 단양천을 따라 산보를 하다 단양천 맑은 물에 목욕을 하고 이 바위에 앉아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바위에 ‘탁오대(濯吾臺)’라 쓰고 그대로 새겨 넣었다 한다. 복도별업(復道別業)을 새겨넣은 바위도 원래 상방리의 탁오대 자리에서 상류로 300m 정도 올라간 지점에 있었다.

 

 

 

 

 

 

 

 

 

퇴계 이황 선생은 단양팔경을 만드시고 선정을 베풀고자 노력하던 것이 여러 곳에서 드러나고 풍유인으로서는 멋도 있었고 행정가로서의 미래예측가능성과 강직함도 있었고 정치가다운 회유책과 발전방향을 제시하는 훌륭한 학자였고 단양에 끼친 영향은 많고 군수가 본받을 바가 많았다고 한다.
조선 명종 3년 (1548) 퇴계 이황 선생이 제 15대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군수로 재임하는 동안에 사법 행정을 동시에 시행하는 당시의 군수에 입장에서는 목민관이라 하여 공정하게 송사를 처리하고 정사를 바르게 처리하자니 보통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기에 우화교와 남한강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으니까 자신도 모르게 순식간에 마음이 맑고 머리가 시원해지면서 심신의 피로가 다 풀리고 갑자기 건강과 생의 의욕이 용솟음침을 느껴 마음을 가다듬는 순간 그 어지럽던 송사의 실마리와 상부에 보고할 정사의 묘안이 하나하나 떠오르고 또, 공문서의 중요한 우선 순위가 정해지자 바로 이곳을 탁오대라 명명하고 단양군수로 재임하는 동안 매일 이곳을 찾아 목욕하고 고찰함으로서 위민선정을 베풀었으며 탁오대의 어원은 중국 굴원의 어부사에서 유래한 말로서

창랑지수청언 가이 탁오영(滄廊之水淸언 可以 濯吾纓)
창랑지수탁언 가이 탁오족(滄廊之水濁언 可以 濯吾足)

흘러가는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흘러가는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는다에서 탁오를 땄고 장소라 하여 대자를 썼으며 현대는 탁오대가 집집마다 있다 나의 더러운 곳을 목욕탕에서 씻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에 더러운 것은 집 목욕탕에서 씻을 수 있으나 마음과 정신의 더러움은 씻을 수 없을 것이다.

퇴계 이황 선생은 그후 홍문관교리(정오품) 성균관 사성(종삼품) 대제학(정이품) 우찬성(종일품)을 역임하고 낙향한 뒤 양진암을 지어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특히 조선 중종 명종 선조로 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으시면서 도산서원을 창설하고 후진양성에 힘쓰셨고 주자학을 집대성하여 당대 석학들로부터 해동주자란 칭호를 받았으며 중종 때 청나라에 선생이 써보낸 글을 청나라 예부상서에서 보고 놀라면서 "조선에도 이렇게 탁월한 학자가 있느냐"고 경탄하면서 글씨가 정묘하면서 단중한 신서라고 극찬했다는 사화가 전래되고 있는 퇴계 이황 선생의 친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