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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남면 보룡리 보룡리석조여래좌상(遠南面 普龍里 普龍里石造如來坐像)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음성군(陰城郡)

원남면 보룡리 보룡리석조여래좌상(遠南面 普龍里 普龍里石造如來坐像)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8. 9. 27. 13:40




원남초등하교를 끼고 돌아 밭둑으로 난길을 따라 들어가다보면 음성군 원남면 보룡리 큰말 서북쪽의 속칭 '탑골'’이라 불리는 골짜기에 있는 보룡사지 내에 남아 있는 석조여래좌상이다.스레트지붕으로 만든 보호각아래 있다.보호각은 1953년에 만들었다고 써있다.지자체의 관심이 필요하다.

접근성도 용이하지 못하며 보호각 또한 많이 쇠락하였다.향토자료전시관등으로 옮기는 것이 나을듯 하다.


이직도 찾는 이가 있는듯 하다 기자석 비슷한 석재가 같이 보관되고 있으며 촛대와 향로가 자리하고 있다.

예전의 영화는 간곳 없고 밭등으로 변한 사지 한귀퉁이에 허름한 보호각아래 세월을 깁고있다.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보룡리 보룡사지에 있는 고려 후기의 석조 불상이다.
보룡리 석조여래좌상은 머리에는 원형관을 쓰고 있는데, 머리는 나발(螺髮)이며 이마에는 백호(白毫)가 나타나 있고, 귀는 길게 어깨에 닿았으며 얼굴은 풍만하다. 목에는 삼도가 있고 눈과 코, 입은 파손이 심하여 알아볼 수가 없다. 양손은 무릎 위에 놓았고 양발은 결가부좌하여 당당한 자세로 안정감을 준다. 법의는 통견(通肩)인데, 의문(儀文)의 굴곡이 뚜렷하며 앞가슴 부분은 U자형으로 탁 트여 있다.


손 모양으로 보아 여래불로 보이나 머리에 둥근 관을 쓰고 있어 존명을 단정하기 어렵다. 미륵불로 불려왔던 것으로 보아 존명과 관계없이 미륵으로 모셔졌던 것으로 짐작된다. 보룡리 석조여래좌상의 높이는 150㎝, 어깨 폭은 40㎝ 정도이다.


보룡리 석조여래좌상은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비정하고 있으나, 당당하고 안정감을 주며, 의문이 뚜렷하고, 주변 사지에서 확인되는 기와가 모두 고려시대의 것이라는 점으로 보아 고려 후기의 것으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사지는 밭등으로 개간되어 추정만 할 뿐 유물은 없다.













보호각에는 석조여래좌상과 남근석으로 알려진 석재 1 매가 있다. 보개를 포함한 불상의 크기는 현재 높이 123 ㎝, 보개 높이 18㎝, 불두 높이 24㎝, 어깨 너비 30㎝, 무릎 너비 105㎝로 불상 전체가 노란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다. 머리는 나발이고, 육계가 낮게 솟아 있으며, 그 위 에는 평면 원형의 보개를 쓰고 있다. 보개 윗면은 중심부 에 1단을 높인 테두리가 있고, 그 중앙에는 원형의 구멍 이 있어서 장식물을 얹어 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얼굴 은 각 부위를 시멘트로 보수하여 원형을 정확히 알 수 없 다. 이마에는 백호공이 있으며, 양쪽 귀는 길게 늘어져 서 양쪽 어깨에 닿았다. 목에는 삼도가 있다. 착의는 통 견이고, 옷주름은 양 어깨에 걸쳐 좌우대칭을 이루면서 양팔과 무릎으로 흘러내리도록 표현되었다. 가슴은 법의 가 깊게 파여 부분적으로 노출되어 있고, 배면에서도 옷 주름이 확인된다.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 위에서 얹었고, 왼손은 왼쪽 무릎 위에 올려 손바닥이 위로 향하도록 표 현하고 있어서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릎은 옷으로 덮여있는데 상체에 비하여 넓은 편이어서 안정감이 있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얹었고, 왼손은 왼쪽 무릎 위에 올 려 손바닥이 위로 향하도록 하였다. 하반신은 대의자락 에 모두 덮여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다. 불상 옆에는 남근석으로 알려진 석재 1매가 있으나 사지와의 연관성을 알 수 없다. 보호각은 종도리에 “塔洞庵 檀紀四二八六年祭巳二月 十六日上樑 重建人潘采奎”이라 쓰여진 상량문이 확인되 어 1953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한국의사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