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음성읍 동음리 창은사(陰城邑 冬音里 倉隱祠)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음성군(陰城郡)

음성읍 동음리 창은사(陰城邑 冬音里 倉隱祠)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8. 8. 3. 20:37




음성읍 동음리에 자리하고 있는 의성김씨의 재실인 창은사입니다.


의성김씨는 김석을 시조로 하고 김준기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입니다.
의성김씨(義城金氏) 시조 김석(金錫)은 경순왕(敬順王)의 다섯째아들이자 왕건의 외손이다.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으며 이에 후손들이 본관을 의성으로 하였다. 의성김씨 가문의 조선시대 인물로 김안국(金安國)[1478~1543]은 연산군 때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와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등을 역임하였다.

『동몽선습(童蒙先習)』·『모재가훈(慕齋家訓)』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김성일(金誠一)은 1568년(선조 1)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급제하여 사은사(謝恩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을 다녀왔으며,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지키다 전사하였다.


의성김씨 음성 입향조는 시조의 18세손 김준기(金俊起)이며 영조 때 음성군 소이면 금고리로 와 세거하였다. 또 병자호란 때 전사한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 김종립(金宗立)의 후손이 맹동면 군자리에서 세거하였으며, 김석의 19세손 김영일이 음성읍 동음리에서 세거하였다.


의성김씨 음성 세거지인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군자리는 통동리 저수지로 인해 마을이 모두 수몰되었다. 소이면 금고리와 음성읍 동음리에 15가구가 세거하고 있다.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군자리 군자터라는 곳에 김종립 충신문(金宗立 忠臣門)이 있다.




동음리는 충청북도 음성군 읍성읍에 속하는 법정리입니다.


본래 음성군 근서면(近西面) 지역으로서 동음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창리(上倉里)·삼생리(三生里)의 일부와 맹동면의 중삼리(中三里) 일부를 병합하고 동음리라 하였다. 1956년 7월 8일 음성면이 읍성읍으로 승격되었다.


옥녀봉[289m]과 함박산 등의 지형이 300~400m 내외로 이루어져 있어 대부분 지형이 높다. 이들 산에서 발원한 물이 남쪽의 원남면에 있는 삼용저수지로 흘러들고 있다. 이 물은 다시 마송천의 물과 함께 남서쪽에 있는 원남저수지로 유입된다.


음성읍의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다. 2007년 8월 기준 면적은 11.10㎢이며,  동쪽은 초천리, 서쪽은 맹동면 인곡리, 남쪽은 삼생리, 북쪽은 감우리와 금왕읍 백야리에 각각 접하고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고추·인삼을 많이 재배하여 농가 소득을 올리고 있으며, 이외에도 벼·콩·참깨·들깨 등을 재배하고 있다.

자연 마을로는 바깥섬이·사기막골·섬이·아랫창골·안섬이·웃창골·월창·창동·한티골 등이 있다. 주요 도로로는 남쪽의 삼생리 삼생교에서 북쪽 윗창골과 오른편의 만생산으로 연결된 도로가 있고, 동음1교에서 금왕읍 백야리로 연결된 도로가 있기는 하나 도로 사정은 대체로 불편한 편이다.






김예숙은 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이다.


본관은 의성(義城). 호는 설암(雪巖). 김득수(金得洙)의 아들이다.


김예숙은 어느 날 김승선(金承宣)의 집에서 공부를 하던 중 갑자기 마음이 놀랍고 온몸에 땀이 나서 주위 사람들의 만류함을 무릅쓰고 급히 집에 돌아와보니, 어머니의 병환이 위독하여 온 집안이 겁에 질려 있었다. 그가 곧 손가락을 잘라 주혈(柱血)하자, 어머니는 회생하여 20여 년을 더 살았다. 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모든 장례와 제례(祭禮)를 극진히 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는 장례를 모시려고 묘소 자리를 파는데 집안의 개가 별안간 나타나 묘소 자리 옆을 세 번 파는 행동을 하여 그 곳에 장사를 지냈더니 대상(大喪)날에 이르러 개가 죽었다. 이 모습을 보고 짐승도 주인의 효성에 감동되었다고 사람마다 칭송이 자자하였다.


도유사(都有司) 정은채(鄭殷采) 외 28명이 완의문(完義文)을 짓고 비석을 세웠다.



김태섭은 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이다.


본관은 의성(義城). 참봉(參奉) 김예숙(金禮淑)의 차남이다.


김태섭은 평소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아버지가 병환이 나서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주혈(注血)하여 3일간을 더 살게 하였다. 돌아가신 후에 장례를 극진히 모시고 시묘(侍墓)를 할 때 밤마다 범이 와서 호위하고 다른 짐승이 오면 소리내어 꾸짖어, 비록 어두운 밤중이라도 범의 안광(眼光)이 촛불같이 환했다고 전한다.


김태섭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도유사(都有司) 정은채(鄭殷寀)를 비롯한 28명이 완의문(完義文)을 짓고 비각(碑閣)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