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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면 북하리 신맹경효자비(丹城面 北下里 申孟慶孝子碑) 본문
단성면 북하리에 신맹경효자비입니다. 북하리 마을 중앙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북하리 마을자랑비를 지면에 옮겨 보았다.
삼국의 소용돌이 역사의 굴레 속에서 원주목, 충주(忠州)목, 단산부, 적성현, 단양군 읍내면, 봉화면(鳳化面), 단양읍(丹陽邑) 구단양출장소, 단성면(丹城面)으로 관할 구역이 바뀌었다. 1985년도 충주(忠州)댐 수몰로 단양군청이 이전할 때 북하(北下)리 673호에서 496호 떠나고 177호 남아 있다. 효자(孝子) 신맹경(申孟慶)이 제천 현감 재직 시에 부모 병구환하고자 겨울에 산딸기를 두악산에서 구하였고 무명지 잘라 피를 드려서 모친 병환이 회생했다. 단양군수 보고하여 선조대왕 명정한 곳, 두악의 정기 받는 뒤뜰에 단양 마늘 원산지로 전국 명성 가득하다. 독지가의 전재산 출연으로 단촌 장학회 설립하니 효자(孝子)마을 후학 양성 자자손손 귀감 되리. 강당소, 벼락바위, 선악의 징표로다.『 죽령천 맑은 물에 느티나무 드리운 곳, 5천년 유서마을 선비유생 은거했네. 두악의 문필이라 문학터전 이루었고 황우전경 주마행보 농업육성 교통로라. 조상대대 물려온 내 고향, 후평(後坪)마실 우리 모두 한 뜻 모아 다함께 가꾸어 보세.』
출천지효(出天之孝)로 이름난 신맹경의 정려비는 단성면 북하리에 있으며 숙종11년(1685)에 세운 것이다. 신맹경의 자는 백상(伯祥), 호는 운계(雲溪),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시조 휘(諱) 숭겸(崇謙)의 22세손이자 군자직장(軍資直長) 개복(介福)의 아들로 명종 5년(1550)에 출생하였다. 부모상을 당하여 6년간을 하루같이 시묘살이를 하는 등 효행이 지극하므로 당시 군수 서인원(徐仁元)이 조정에 상주하여 서릉참봉(西陵參奉)에 제수되었고 선조 26년(1593) 정려되었다.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고 글씨는 곡운 김수증이 썼다.
비 전면 : 孝子通訓大夫行堤川縣監忠州鎭營兵馬節制都尉申孟慶之閭萬曆二十一年月日命旌 崇禎紀元後五十八年乙丑七月日立石
비 후면 : 孝子堤川縣監申公旌閭碑記
丹陽之北坪里有篤孝人曰申孟慶字伯祥號雲溪自朝廷命旌其門曰記其行於三綱續錄曰自少有孝行父病疽之有宿疾長在床褥晝夜不離側不解帶歷一紀如一日及沒廬粥三年母病醫言蝟肉爲對症藥蒼皇求索忽有蝟前走持以進之病卽愈又爲母斷指和藥云事又見蒼石李公埈丹陽誌其曰父死哀毁三年不鹽菜殆滅性其曰母病每嘗糞爲參奉爲養不仕通訓大夫行淸風都護府使金壽增書元不見以其光海朝廢母疏也有村庄小艾心憁公其母嘗也蜜來請使篤枕公拒之甚嚴又云萬曆癸巳甲午流盈門公爲粥一一哺之其中有公異其言貌使居宅內勿令奴僕相近後討其根脚而遺還之果良族也聞孝義之又按其家譜則公籍原州信城府院君贊之後考直長介福母白氏娶泰原尹氏生二子三女年七十二而沒于天啓辛酉墓在郡東栗峴官至縣監蓋公篤於其親推之兄弟而友見流濱死而仁待良家女息而義至於不見不義之壻則人之所難也能拒不正之色則又是愼獨孝之事然獨以孝著豈曰孝者百行之源乎余具著始終以遺其孫益謙碑刻于石云原任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使致仕奉朝賀
宋時烈識
通訓大夫行淸風都護府使金壽增書
효자 신맹경은 조선 명종 5년 서기1550년2월3일 평산신씨 시조 장절공의 21대손이며 신성부원군(信城府院君)파 7대손으로 충북 단양군 북평리,현재 단양군 단성면 북하리 96번지 수몰된 申相德家에서 아버지 신개복(申介福)과 어머니 선산백씨(先山白氏)사이에 3형제중 맏이로 태어났다. 이 마을은 平山申氏네가 옹기종기 모여서 대성을 이루어 살고 있었으며 신개복(申介福)은 계공랑군자직장(啓公郞軍資直長)이라는 벼슬인데 군대에서 군수품을 관장하는 책임자이다. 申孟慶은 어릴때부터 마음씨가 착하고 유순한 성품으로 집안사람들은 물론 동네사람들에게도 착한아이로 이름이 높았다. 철이 들면서 글방에 다니면서 천자문을 시작으로 한문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학동들 가운데서도 먼저 깨우치고 같은 친구들을 돌봐주며 접장의 책임으로 학방에서 늦게 깨우치는 학생들에게는 분단장이요 학급반장의 일을 맡아서 했다.(접장은 지금의 학급반장인 것이다) 학방 공부를 마치자 지금의 중학교에 해당하는 단양향교에서 글을 배우게 되었다. 매일 놋재를 오르내리면서 통학하다가 차차로 학년이 높아지면서 향교에서 합숙을 하며 공부하고 결국에는 유림의 추천을 받아 서울로 과거를 보러 떠났다. 단양에서 서울 과거 길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북하리에서 장회를 지나 황강을 거쳐 마지막 재를 넘어 충주. 장호원. 이천으로 해서 과천을 지나 도성(성안)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원래가 성품이 강직하고 대쪽같이 곧은 마음의 소유자인 申孟慶 선비는 하인 한사람을 데리고 과거 길에 올랐다.오고가며 말벗도 되며 잔심부름도 시키고 노잣돈(여비)으로 쓰이는 엽전이 무거워서 하인 몸에 지니게 하고 申孟慶 선비는 작은 전대(지금의 돈지갑)에 엽전을 몸에 지니고 갓모(갓에 비가 맞지 않게 만든 모자형의 우비)짚신, 도포 등을 챙겨 지키고 개나리 봇짐의 초라한 차림으로 한양 과거 길을 떠나 일주일이 걸려서 한양(서울)에 도착하게 되었다. 경복궁 잔디밭에서 치러지는 과거 시험에서 참봉벼슬에 급제하였다. 초라한 시골선비 申孟慶은 하인을 대동하고 금의환향(금의환향)하였다. 때는 조선14대 선조대왕 16년의 일이다. 그해부터 연거푸 2년 동안 단양지역 뿐만 아니라 전국에 무서운 흉년이 들어 쑥뿌리와 송피(소나무껍질),도토리 등으로 백성들이 연명을 하고 있을 때 과거 길에서 돌아와 정부관리가 되려고 대기하고 있으면서 집안 곳간(곡식창고)을 열어 모든 곡식을 남김없이 풀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어 굶어 죽는 사람들을 무수히 구해주는 구휼(救恤)사업에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이것은 아무런 보상이나 인정을 바램이 아니라 원래가 천성이 착하고 인정이 많은지라 하늘의 이치에 따랐을 뿐이었다. 이런저런 행적(行蹟)을 丹陽 監領(단양군청)에서는 朝廷(중앙정부)으로부터 특사 편으로 보고하였다. 선조대왕(선조대왕)께서는 자기의 부덕함을 하늘이 알고 흉년을 내리는데 지방에 있는 어진 백성 중에 나라님을 대신해서 백성을 돌봐주는 고마움에 끝이 없어 알고 보니 壹年 前에 급제한 초라한 차림의 신맹경 참봉(申孟慶 叅奉 ; 종9품 벼슬)의 행적임을 알게 되어 그 즉시 堤川縣監(종6품벼슬)으로 봉하고 겸해서 충청병마절도사(忠淸兵馬節度使)에 관직을 제수 받았다. 병마절도사란 군대에서 쓰여지는 군량미, 장정의 노력동원, 모병 등의 업무를 관장하는 책임자이다. 이때부터 申孟慶 堤川縣監은 늙으신 부모님을 北坪里 본집에 남겨둔 채 제천감영에서근무하게 되었다.사람은 늙으면 자연히 병이 들게 마련이다. 아버지께서는 몹쓸 종기병을 앓게 되었는데 자주 문안을 드리고 그때마다 종기부위를 입으로 빨아서 환부의 독을 3개월만에 제거하고 새 살이 돋게 하였다. 그로부터 몇 해 동안은 건강하게 지내시고 申孟慶 縣監도 안심하고 국정을 돌볼 수 가 있게 되었으나 늙으신 아버지는 다시 병석에 눕게 되시고 점점 몸이 쇠약 해 지시기 시작하였다. 자주 의원 약을 지어다 달여 들이고 극진히 봉양하였지만 백약이 무효하며 노인네 병환은 점점 깊어만 가고 있었다.어느날 申孟慶 縣監은 제천에서 용한 의원에게서 약을 지어서 丹陽 北坪里에 와서 달이려니 시간이 다급함으로 그 자리에서 정성껏 약을 달였다. 잘 달여진 약을 끓는 체로 藥湯罐을 다래끼에 담아서 단양으로 향하였으나 시간은 벌써 땅거미가 지고 멀리 보이는 마을에는 호롱불 빛이 하나, 둘씩 더해가고 있었다.제천에서 단양까지는 80리길, 부지런히 걸어도 8시간이 걸리는데 그 중에는 상진나루 뱃길까지 가로 놓여 있는 것이다. 밤새껏 걸어도 새벽 닭이 울고서야 北坪里에 도착하여 아버지께 약을 바칠 것이다. 라는 마음속에 다짐을 굳게 하고 걸음을 재촉하지만 마음만 조급할 뿐이다. 걸어가는 발걸음에 약이 식기 전에 도착하기에는 어림없는 일이다. 길가 바위위에 걸터앉아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고 신들매를 고쳐매고 좀더 부지런히 걸어볼 양으로 마음에 준비를 하면서 다시 걷기 시작하였다. 행여 藥湯罐이 넘어질까 약이 더 식을세라 풀 검불을 뜯어 받치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몇 시간이 지나 밤이 벌써 깊었는데 싸늘하게 식었어야 할 藥湯罐에서 아직도 자글자글 약 끓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지 않읍니까! 그런데 난데 없는 큰 호랑이가 한마리 나타나서 넓직한 등을 들이 대고 타라는 시늉을 하더랍니다. 申孟慶 縣監은 조금도 겁내지 않고 뒤로 한발 물러서서 큰 소리로 『나는 아버님의 약을 달여서 갖다 드리려고 하는데 약이 식기 전에 가려하니 길이 바쁜 나를 방해하지 말고 썩 물러가라라고 산천이 울리도록 호통을 쳤으나 호랑이는 또 다시 뒷다리를 쭈그리고 허리를 낮추고 등을 들이 대므로 그제서야 알아차리고 호랑이 등에 올라타고 약 다래끼 끈을 꼭 잡은 채 양 팔을 크게 벌리고 호랑이 등에 철썩 붙어 주었다.호랑이는 내달리기 시작하였고 申孟慶 縣監은 호랑이 등에서 떨어 질까봐 호랑이 등을 꼭 껴안고 꼭 껴안을수록 호랑이는 달리는 몸가짐이 완벽함으로 점점 빨리 달리는 것이었다. 마을 앞, 정자나무, 외딴 주막집, 흐르는 냇물, 들녘, 산 그림자들이 싸늘한 별빛에 가리워 진체 쏜살같이 지나갔다. 얼마쯤 달려왔는지 자정이 덜된 시간에 벌써 단양 북평리 申孟慶 縣監집 마당에 당도하여 허리를 낮추고 내리라는 시늉을 하고 현감이 내리자마자 호랑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정신을 차려 약탕관을 챙겨 병석에 누워 계신 아버지 앞에 바칠 때 까지도 약 끓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 따끈한 약을 드신 아버지께서는 많은 효험을 보시고 한 동안 쾌차 하셨다고한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申孟慶 縣監의 효행실화(孝行實話)는 사람들 입을 통해서 입으로 바람을 타고 마을과 마을로 온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申孟慶 堤川縣監은 縣監으로서의 관직보다는 몸을 단정히 하고 사람을 대할 때에도 위, 아래를 잘 살펴 대하고 언행과 예의 범절을 잘 지키며 부모님을 편히 모시기에 정성을 극진히 쏟았으나 늙으신 아버지는 또 다시 자리에 눕게 되셨다. 제천 현감에 봉해 있는 것이 부모를 봉양하는 일에 소홀해 짐을 생각한 신맹경 효자는 스스로 제천현감 겸 충청병마절도사(堤川縣監 兼 忠淸兵馬節度使 )직을 사임하고 부모봉양을 극진히 하기에 전력을 다 하였다. 申孟慶 효자는 여러 달 동안 병마에 고생하시는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고 허리띠를 한번 편히 풀지 못하고 항상 수잠을 자가면서 극진히 봉양하였으나 늙으신 아버지는 희미한 등잔불처럼 점점 쇠잔해 지고 끝내는 돌아가시고 말았다. 申孟慶 효자는 아버지를 현재 단양읍 현천리 새마을 뒷산 밤 고개에 장사 지내고 그 옆에서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하며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편히 해드리지 못함을 돌아가신 뒤 늦게나마 조금이라도 그 뜻이 소홀히 되지 않게 상복을 입고 외출을 금하고 외부인의 접촉을 삼가하고 오직 돌아가신 아버지의 영혼과 같이 지내면서 자기의 불효함을 사죄하며 지내는데 그때마다 제천현감 재직시 약과 같이 태워다 준 호랑이가 나타나서 申孟慶 효자의 쓸쓸함을 달래주었다고 한다. 3년 동안의 侍墓살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아시게 된 선조대왕께서는 申孟慶 효자가 제천현감((堤川縣監)을 사직한 이유가 아버지 병구완 이었으므로 이제 侍墓살이까지 마치었으니 이런 착하고 어진 효자를 국가에서 재 등용하고자 이번에는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발령을 냈으나 아버지를 잘 못 모셔 불효한 사람에게 현감 직에 나가면 백성들에게 부끄러우므로 다시 창녕현감직((昌寧縣監職))도 사직하고 집에 외롭게 살고 계시는 어머니를 모시기로 결심하였다. 오랫동안 편히 모셔야 할 어머니 선산백씨(善山白氏)도 병석에 눕게 되었다. 아버지를 편히 모시지 못한 후회가 하늘에 사무치도록 3년간 아버지 시묘(시묘)살이에서 돌아온지 바로 어머니의 병구완이 시작되었다. 전에보다 더욱 더 극진히 돌봐드리지만 어머니 병은 점점 깊어만 간다. 병중에 정신이 몽롱한 어머니 귀에 대고 큰 소리로 『무엇이 잡숫고 싶습니까』하고 물으니 『딸기가 먹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申孟慶 孝子는 큰 걱정이 생겼다. 원래 딸기는 5월달에 밭두렁에 열리는데 동지섣달 눈밭 속에서 딸기란 있을 턱이 없었다.申孟慶 孝子는 태산같은 걱정을 안고 딸기를 구하러 나서시었다. 여하튼 여름에 딸기가 많이 달려있던 현 北下里 뒤의 두악산의 덕지골로 헛 걸음인 줄 알면서도 사랑하는 어머니의 영을 어길 수 없어서 언덕배기 딸기 덤불을 혹시나 하는 미련을 갖고 이리뒤적 저리뒤적 흰 눈 속을 살피고 지나가는데 이것이 웬 일입니까? 흰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눈 속에서 붉은 빛이 빛나면서 붉게 익은 먹음직스런 딸기가 덩굴이 비좁을 정도로 탐스럽게 달려있었다. 申孟慶 孝子는 흰 눈을 헤치면서 딸기를 주전자로 절반가량 따서 집으로 갖고 와서 어머니께 드리고 기운을 차리게 해 드렸다. 딸기를 잡숫고 기력을 찾은 어머니께서는 며칠 뒤에 또 무엇이 잡숫고 싶으냐고 여쭈니 이번에는 복숭아가 잡숫고 싶으시다고 대답하셨다. 申孟慶 孝子에게는 큰 걱정이 생겼다 원래가 과일을 좋아하시는 어머니는 시도 때도 모르고 과일을 찾으신다.때 아닌 겨울철에 복숭아를 구해 오라고 하거나 가라고 하는 사람도 없는데 申孟慶 孝子의 발걸음은 가보나 마나 없는 줄 알면서도 혹시나 기적이 있을까 하며 복숭아 밭에 가서 서성거리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천도복숭아가 물러서 나무 밑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정성껏 주워서 집으로 갖고 와서 맛있게 잡수시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를 지나서 의원을 불러 물어보니 고슴도치 고기가 약이라고 하여 고슴도치를 구하러 나섰다.역시 덕지골 산길을 거닐며 고슴도치를 찾아 다녔다. 평소에 풀벌레 한 마리도 함부로 죽이지 않던 申孟慶 孝子가 고슴도치 잡기란 눈에 뜨인다 해도 잡는 것이 큰 걱정이었다. 하여간 산짐승을 잡자면 산에 가야하니까 산길을 무작정 거니는 동안 우연히 고슴도치 한마리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여 황급히 갖고 간 자루에 굴려 담아 갖고 와서 어머니께 약을 해 드렸다.이와 같이 잡숫고 싶은 것도 힘껏 구해다 드리고 약도 조약을 비롯해서 의원 약까지 좋다는 약을 다 쓰며 병구완도 정성껏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이고 늙고 병든 어머니는 점점 쇠약하고 간간이 혼수상태가 계속되어 위급하게 되자 申孟慶 孝子는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위하는 일은 이것뿐이라고 생각하며 자기의 왼손 약손가락을 자기의 오른손으로 잘라 뚝뚝 떨어지는 뜨거운 피를 목구멍으로 흘려드렸다. 그 효험으로 잠시 정신을 차렸던 어머니는 끝내 눈을 감고 마시었다.이런저런 효행의 소문은 입과 입을 통해 산과 물을 건너 마을과 마을로 전파되어 온 나라 사람들의 아낌없는 칭송을 받으며 자신도 늙고 병들어 더 행하고 싶은 효행을 마감하고 세상을 하직하고 말으시었다. 때는 조선조 15대대 광해군 13년(辛酉)의 일이다. 2년 후 인조대왕이 등극하자 단양군수와 제천 현감은 앞을 다투어 申孟慶 孝子의 효행실적을 담은 상소문을 소상하게 작성하여 올리게 되었다. 인조대왕은 상소문을 읽으시고 선대왕인 선조16년에 흉년이 계속될 때 빈민구제사업에 공이 지대하였음을 알아보시고 크게 기뻐하시어 효행실적을 세상에 널리 알리면서 효행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단계사(丹溪祠)라는 이름의 서원을 사액(賜額)하셨다.이때부터 호가 雲谿인 申孟慶 孝子의 위패를 더욱 돈독히 모시고 그의 효행을 이어받는 정신으로 어린이들은 글을 배우고 어른들은 수시로 모여서 시를 읊으며 학문을 연구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영모정(永慕亭)이라는 정자가 지어지고 학생들이 강의를 받으며 공부할 수 있는 강당과 그리고 효행 실적을 영원히 보전할 수 있는 비각도 지어 졌다. 비문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쓰셨다.이 비석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는데 소개할까 한다.그 당시 단계사(丹溪祠) 앞 깊은 냇물에서 큰 비석이 두개가 떠올랐다고 한다. 한개는 건져서 운계공 효자의 비석을 만들었고 한개는 건지려고 하니 온데 간데없이 다시 깊은 물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렸는데 지금까지 찾지 못했다고 한다.이 비석은 孝子 雲谿公 자손중에서 또한 효자가 나타나면 다시 떠오를 것으로 마을사람들은 믿고 있으며 자손들은 그 남아 있는 비석의 임자가 되기를 원하면서 남다른 모범을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효자비(孝子碑)를 자세히 관찰하면 이 부근에 없는 바다에서 나는 해중석(海中石)이고 그렇게 크고 무거운 돌을 누가 어떻게 운반했는지 전설대로 믿어 보는것이 오히려 편안하다. 단계사(丹溪祠)는 인조임금께서 하사하신 有一無二한 단양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이었는데 高宗8년 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헐리게 되고 孝子閣만 외로이 남게 되었다. 이때 헐어낸 집 재목은 단양관아로 갖고 가서 부속 건물을 지었는데 충주 댐으로 인해 수몰되기 전에 단양면사무소 뒤에 있는 古家는 이 재목들의 일부라고 한다. 효행(孝行)은 운계공(雲谿公)만이 행(行)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누구나 행할 수 있는 평범한 일을 실행했을 뿐이다. 어려운 일은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늘도 도와 주었읍니다.효자 신맹경의 호는 운계입니다. 옛날 문헌에 대강면 장림리에서 북상,하리를 지나 한강으로 흘러가는 냇물을 운계천(雲谿川)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하늘도 감동하여 산신령을 내려 보내고 임금께서 내린 사액서원인 단계사(丹溪祠)의 주인공이 효행실적을 남기고 이 냇물과 더불어 생활했으며 그의 효행정신이 냇물에 흘러들었는데 그 물을 마시고 생활용수로 사용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의 효행정신이 스며들으라고 운계천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남아있다. 북하리 마을 한중간 느티나무 숲 속에 단계사 강당 영모정이 있던 자리이다. 느티나무는 그때 일을 생생하게 증언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을 앞 냇물 깊은 곳을 강당소라 부른다.강당이 바로 앞에 있으므로 그때부터 강당소라 불리어져 온 것이다.[단양의 화통.신영섭씨의 블로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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