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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崗面 舍人巖 繩直準平 玉色金聲 仰之彌高 魏平無名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단양군(丹陽郡)

大崗面 舍人巖 繩直準平 玉色金聲 仰之彌高 魏平無名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8. 10. 21. 21:10





절벽은 먹줄을 튕긴듯 바르게 솟았고

편편한 절벽에 노을이 머금 었는데

쳐다 볼수록 더욱 높아 보이고

편편한 절벽암면에는 이름이 없구나.


신미년(辛未年)/영조27년 1751년 봄에 이인상(李麟祥)과 이윤영(李胤永) 김종수(金鍾秀)가 글을 짓고 글씨를 써서 새긴 각자이다.




이윤영, 이인상, 김종수 세 사람은 1751년(영조 27) 사인암을 유람한 뒤 이를 기념하여 옛 글을 집구(集句)하여 사인암을 찬미한 글을 짓고 이를 이인상이 써서 암벽에 새겼습니다.

“먹줄 튕긴 듯 곧고 수평처럼 평평하네. 
옥색의 빛을 띠고 쇠소리 어울렸네.
우러러 볼수록 더욱 높아지고 
높고 큰 모양이 이를 데가 없네.
신미년(1751년 영조 27) 봄 윤지 이윤영, 정부 김종수, 원령 이인상이 짓다“
(繩直準平 玉色金聲 仰之彌高 魏平無名 辛未春 胤之 定夫 元靈 撰)

이윤영은 주자의 <육선생화상찬(六先生畵像贊)>에 나오는 “규는 둥글고 구는 방정하니 승은 곧고 준은 고르다(規圓矩方 繩直準平)”에서 승직준평(繩直準平)을 첫 구절로, 명도선생(明道先生) 화상찬에서 옥색금성(玉色金聲)을 둘째 구절로 빌려 왔습니다.

김종수는 <논어> 자한(子罕)에서 안연이 공자의 도가 무변광대함에 감탄하여 이른 “우러러보면 더욱 높고 뚫어 보면 더욱 단단하며, 바라보니 앞에 있다가 문득 뒤에 있도다(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에서 앙지미고(仰之彌高)를 빌려 셋째 구절을 썼습니다.

넷째 구절의 위평무명(魏平無名)은 단릉(丹陵)의 문집에 있는 것과는 첫 자가 다른데 바위에는 위(魏)로 새겼지만 문집에는 외(巍)로 되어 있으며 이 또한 <논어>의 태백(泰伯) 편에 나오는 요 임금의 높고 큰 덕을 칭송하는 대목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윤지, 정부, 원령은 이윤영, 김종수, 이인상의 자(字)이며 김종수는 30년 지기인 이인상과 이윤영과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만 그의 집안이 노론의 명문가였기에 함께 어울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인상(李麟祥)은 1710년(숙종 36) 경기도 양주군 회암면에서 태어났으며 시서화(詩書畵) 모두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불렀습니다. 그의 집안은 명문가였지만 증조부 이민계(李敏啓)가 서출(庶出)이라 고위관직에 오르기는 어려워서 예술에 심취하였는지도 모릅니다.

1735년(영조 11) 진사시에 합격하여 북부참봉을 거쳐 음죽 현감, 지리산 사근역 찰방이 되었으나 관찰사와의 불화로 사직하고 다시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단양의 구담(龜潭)에서 은거하였습니다. 

이윤영(李胤永)은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윤지(胤之), 호는 단릉(丹陵)이며 이색의 14대손이자 담양부사 이기중(李箕重)의 아들로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산수와 더불어 평생을 보냈는데 평소에 단양의 산수를 좋아하여 즐겨 찾더니, 부친이 담양 부사로 재직하자 구담에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지냈기 때문에 단릉산인(丹陵散人)이라 하였습니다. 

이인상과는 절친한 벗으로 노론의 문사들인 송문흠(宋文欽), 김종수, 김무택(金茂澤), 신소(申昭), 황경원(黃景源) 등과 교유하며 지은 많은 시문이 <단릉유고(丹陵遺稿)> <단릉산인유집(丹陵散人遺集)>에 실려 있으며 글씨는 특히 예서와 전서에 뛰어나 30년 지기인 이인상의 그림에 화제(畵題)를 많이 썼습니다. 

김종수(金鍾秀)는 1728년(영조 4)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진사가 되어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를 거쳐 176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보직되어 정조의 사부가 되었습니다.  

1778년(정조 2) 왕위에 오른 정조가 그를 기용하여 승지에서부터 1년 사이에 우참찬, 병조판서에 이르렀고 1780년 이조판서가 되어 홍국영을 몰아냈고 의금부판사, 대제학,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하였으며 정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