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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박물관 고려사(淸州博物館 高麗史)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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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박물관 고려사(淸州博物館 高麗史)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8. 11. 3. 09:31



청주박물관에서 고려시대에 충북에 있던 절터와 유물을 전시하는 전시회가 있었습니다.

전시회를 둘러보며 많은것을 배우고 둘러볼수 있었습니다.




고려사는 1449년(세종 31)에 편찬하기 시작해 1451년(문종 1)에 완성된 고려시대 역사서.

고려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인물 등의 내용을 기전체()로 정리한 관찬사서로 고려시대 역사연구의 기본 자료이다. 『고려사』는 조선 건국 합리화라는 정치적 목적과 아울러 이전 왕조인 고려의 무신정권기∼우왕·창왕기까지의 폐정을 권계하고 교훈을 찾고자 하는 목적으로 편찬되었지만, 사료 선택의 엄정성과 객관적인 서술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총 139권 75책. 전체 구성은 세가() 46권, 열전() 50권, 지() 39권, 연표() 2권, 목록() 2권으로 되어 있다.

『고려사』가 『국조보감()』과 『증보문헌비고()』에는 1454년(단종 2)에 간행되어 널리 반포되었다고 하였으나, 이는 현전하지 않는다. 이듬해인 1455년 을해자()로 인쇄된 주자본()과 그 뒤(중종 연간) 을해자를 복각한 목판본이 세간에 전해 내려왔다.

1908년 일본의 국서간행회에서 활판본()을 3책으로 간행하였다. 1955년 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에서는 동대학교 도서관 소장 최한기() 수택본()을 3책으로 영인하고, 색인 1책을 인쇄하여 출판했다. 1972년 아세아문화사에서 을해자 인본()과 궐본인 세가의 권19∼21, 권31, 지의 권27·28·31·33·35·37을 을해자의 복각 목판본으로 보충하여 영인하였다. 또한 1971년 동아대학교 고전연구실에서 11책과 색인 1책으로 국역() 간행하였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1613년(광해군 5) 목판본이 2010년 9월 20일에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04호로 지정되어 있다.

편찬의 연원은 고려 말기 이제현()·안축()·이인복() 등이 편찬하고자 시도한 『국사()』에까지 올라간다. 그러나 이제현이 태조에서 숙종까지의 본기()만을 편찬했을 뿐 그 나머지까지 완성하지 못했다. 그 본기의 내용은 현전하지 않으나, 다만 각 왕의 본기 말미에 써 붙였던 사찬()이 『익재난고()』와 『고려사』·『고려사절요』등에 전하고 있다.

조선이 건국되자 태조 이성계는 1392년(원년) 10월 조준()·정도전()·정총() 등에게 고려시대 역사의 편찬을 명했다. 이에 따라 1395년(태조 4) 정월에 정도전·정총에 의하여 편년체()로 서술된 37권의『고려국사()』가 편찬되었다. 이 책도 현전하지 않으나, 『태조실록』과 『동문선』에 정도전이 쓴 「진고려국사전()」과, 정총이 쓴 「고려국사서()」가 수록되어 그 편찬 체재와 편찬 시의 기본원칙 등을 살필 수 있다. 그러나 『고려국사』는 단시일에 편찬되고 또 찬자인 개국공신들의 주관이 개입되었다 하여 비판받았고, 태종이 즉위한 이후 조선 건국 과정에 대한 기록이 부실하다는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이에 태종은 1414년(태종 14)에 하륜()·남재()·이숙번()·변계량() 등에게 개수()를 명하였다. 그러나 1416년(태종 16) 개수의 책임자인 하륜이 사망함으로써 완성되지 못하였다.

그 뒤 세종은 『고려국사』의 공민왕 이후 기사 서술에 잘못이 있음을 지적하고, 1419년(세종 원년) 9월 유관()·변계량()에게 개수를 명해, 1421년(세종 3) 정월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 이 때에 공민왕 이후의 기사 중 고려 사신()의 사초() 및 다른 내용들과 ‘고려의 왕실 용어로서 중국에서 사용하는 용어와 일치하는 것’ 중에서 정도전 등이 미처 고치지 못했던 것을 전부 개서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반포하지 못하고 있다가 다시 개찬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역시 참칭()의 개서 문제에 있었다.

1423년(세종 5) 유관과 윤회()에게 제2차 개수 작업에서 문제가 되었던 참칭한 용어라도 실록을 대조하여 당시 썼던 용어를 그대로 직서()하도록 하여 1424년(세종 6) 8월에 완성을 보게 되었다. 이를 『수교고려사()』라 칭하였다. 그러나 참칭한 용어의 직서를 강경히 반대하는 변계량의 주장으로 반포가 중지되었다.

제4차의 고려사 편찬은 1438년(세종 20)에서 1442년(세종 24) 사이에 신개()와 권제()에 의해 『고려사전문()』이 완성되어 왕에게 바쳐졌다. 이 때 개수된 내용은 소략한 내용의 보충과 개칭된 용어의 직서에 관한 것이었다. 이 『고려사전문』은 1448년(세종 30) 주자소()에서 인출했으나, 교정 과정에서 역사기술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문제점이 제기되어 반포가 중지되었다. 이 책의 문제점은 권제가 남의 청탁을 받고 고쳐 쓴 점과 자신의 조상에 대한 기술이 사실과 다르게 기록된 것 등이었다.『고려사전문』은 편년체의 역사서로서 내용이 크게 보완 시정된 것이었으나, 공정하지 못한 점이 일부 있다고 하여 끝내 반포되지 못하고 폐기되었다.

세종은 1446년(세종 28) 10월 『고려사전문』의 고려 말기 기사에서 태조 이성계의 선대 도조()·환조()로부터 태조에 이르는 기록에서 빠진 내용들을 발견하고, 1449년(세종 31) 정월 우찬성 김종서(), 이조판서 정인지(), 호조참판 이선제() 등에게 개찬을 명하였다. 이 때에는 사체()의 문제가 새로이 제기되었다. 이에 세자(뒤에 문종)와 함께 왕에게 건의해 편년체에서 새로이 기전체로 편찬하기로 허락을 받았다.

이리하여 1451년(문종 원년) 8월 김종서 등에 의해 태조∼공양왕까지 32명의 왕의 연대기인 세가 46권, 천문지()∼형법지()까지 10조목의 지 39권, 연표 2권, 1,008명의 열전 50권, 목록 2권을 합해 총 139권의 『고려사』가 편찬되었다. 이로써 전왕조사()를 정리하려는 노력은『고려국사』편찬으로부터 시작해 57년 만에『고려사』로 마무리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 왕조가 건국된 이후 전대사를 방대하게 정리한 것은『고려사』가 지나간 역사에 대한 정리뿐만 아니라, 고려 군신들의 자취를 참고로 하여 새로운 조선 왕조의 통치에 적극적으로 이용하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바로 인쇄되지 못하고 1454년(단종 2) 10월 정인지의 이름으로 인쇄 반포되었다.


여러 차례의 개찬 과정에서『고려사』는 내용이 크게 보완되었다. 즉 고려시대의 『실록()』·『동문수()』·『고금상정예문()』·『식목편수록(錄)』·『제가잡록(錄)』·『금구집()』·『용비어천가()』 등의 자료가 새로이 이용되었다. 그 편찬 체재가 기전체였으므로 반복되는 기사도 모두 실을 수 있었다. 천문()과 오행()의 변이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그 단적인 예이다. 따라서 그 당시에 구할 수 있는 자료를 빠뜨리지 않고 거의 모두 수록했다고 생각된다. 또한 『고려국사』이래의 편찬 과정에서 크게 문제되었던 인물 평가에도 객관적인 서술로 개서되었다. 한 개인에 대한 칭찬과 비판의 자료가 있을 때는 이를 모두 기재하였다. 예컨대 고려 말에 의리를 지킨 정몽주()·김진양()등을 충신으로 기록하여, 조선 건국자와 견해를 달리한 인물 평가에 상당히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고려사』편찬에 참여한 인사들을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고려사』에는 수사관() 32인이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 이 수효보다 훨씬 상회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김종서·유성원()·박팽년()·허후() 등은 이후의 사건으로 인해 명단에서 빠졌기 때문이다.

편찬의 역할에서 기사를 빼거나 보태는 작업은 고위책임자였던 김종서·정인지·허후·김조()·이선제·정창손()·신석조() 등이 담당하였다. 그리고 열전은 최항()·박팽년·신숙주()·유성원·이극감() 등이었고, 세가와 지·연표는 노숙동()·이석형()·김예몽()·이예()·윤기견()·윤자운()·양성지() 등이 담당하였다.

『고려사』에 실려 있는 범례 5조를 보면 세가·지·표()·열전·논찬에 대한 서술원칙을 알 수 있다.


(1) 세가

세가의 편찬 원칙으로 왕기()는 제후의 격에 맞는 세가로 하여 명분을 바로잡고, 세가를 쓰는 법은 『한서()』와 『원사()』의 서술 원칙에 따라 사실과 언사()를 모두 기술한다는 것이다. 그 명칭을 『삼국사기』의 ‘본기()’와 달리 ‘세가’로 정한 것은 주자학적 명분론과 대명의식()이 작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세가를 기술하는 데 모범이 된 사서는 『원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종()이나 폐하()·태후()·태자()·절목()·제조()를 칭한 경우는 비록 참유()한 것이지만, 당시에 칭했던 대로 기록해서 사실을 보존한다고 쓰고 있다. 고려 말엽 민지()·정가신()·이제현 등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의 정도전·변계량 등은 이를 제후국의 칭호에 맞도록 낮춰 썼었다. 그러나 이제 당시의 기록대로 직서한다는 원칙이 세종의 판단과 젊은 수사관들의 요청에 의해 채택되었던 것이다. 이는 자주성 회복을 위한 문화적 기반을 마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원구()에서의 제천, 적전()·연등회()·팔관회() 등 매년 치러지는 행사는 첫 기사만 쓰되, 왕이 직접 참여한 경우는 반드시 기록한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고려 왕실의 세계()는 황주량()이 찬한 실록에 의거해 삼대()를 추증한 것을 사실로 취해 쓰고, 다른 기록에 전하는 것은 별도로 첨부한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태조의 세계는 목록 앞에 별도로 붙이는 특이한 방식을 취했는데, 이는『고려사』가 기준으로 삼은『원사』와는 다른 점이다. 세계에서 정사()인 실록 기사를 따르면서도 이와 다른 내용을 전하는 김관의()의 『편년통록()』이나 민지의 『편년강목()』의 이설()까지도 싣고 있어, 『고려사』 편찬자의 문헌 중시의 서술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2) 지의 기술원칙은 사실을 분류해 싣는『원사』에 의거한다는 것과『고금상정예문』·『식목편수록()』및 여러 사람의 잡록을 취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실제 『고려사』의 지는 천문지 3권, 역지() 3권, 오행지() 3권, 예지() 11권, 악지() 2권, 여복지(輿) 1권, 선거지() 3권, 백관지() 2권, 병지() 3권, 형법지 2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원사』와『송사』를 참조해 지를 설정하였다. 예지가 분량이 많은 것은『고금상정예문』의 자료를 옮긴 데에 기인하며, 형법지는 주로『식목편수록』의 자료를 바탕으로 기술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에는 각기 그 서문이 있고, 지는 다시 세부 내용별로 항목을 구분해 저술하였다. 항목별로는 먼저 연월이 없는 일반적인 기사를 싣고 뒤에 연월이 기록된 구체적인 역사 사실을 기술하였다. 서문과 각 항목의 일반적인 기사는『고려사』편찬자가 쓴 문장인데 자료로서의 신빙성에는 문제가 있지만, 편찬자의 역사의식과 고려사에 대한 이해 태도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대체로『고려사』편찬자는 고려의 통치제도는 당나라 제도를 모방했다고 파악하고, 초기로부터 발전해오다가 무신정권을 계기로 통치제도가 붕괴되어 말기에 이른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3) 표의 범례에서는『삼국사기』에 따라 오직 연표만을 작성한다고 밝혔다. 실제『고려사』연표의 서문도『삼국사기』의 것을 참고하였다.『고려사』연표 서문에서 태조가 신라를 항복시키고 백제를 멸망시켜 삼한을 통합했다는 서술은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밝힌 것이다.

연표에는 중국과 우리나라 연표를 대조하면서, 우리나라 연표의 난에는 왕의 즉위 사실, 외국 연호()의 사용, 왕을 책봉하기 위해 온 책봉사의 기사, 반역자의 기록, 집정무신의 교체 사실 등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세가에서 기술되지 않고 반역() 열전에 기술된 우왕과 창왕을, 연표에서는 원년 이하 재위 연표를 다른 왕과 똑같이 하고, 단지 신우()·신창()으로 표기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세가·열전과 연표가 서로 다른 사람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점과 연표가 가지는 특수성에서 찾을 수 있다.


(4) 열전

열전의 범례에서는 열전의 구성 순서와 특별한 업적이 없는 경우에는 부자()를 같은 전()에 합쳐 싣었다고 하였다. 또한 우왕·창왕은 역적인 신돈()의 자손이므로 이들 16년간의 역사는 『한서』 왕망전()의 예에 따라 열전에 써서 역적을 토죄하는 뜻을 밝힌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열전은 후비전() 2권, 종실전() 2권, 제신전() 29권, 양리전() 1권, 충의전()·효우전()·열녀전()·방기전()·환자전()·혹리전() 1권, 폐행전() 2권, 간신전() 2권, 반역전() 11권의 총 50권으로서『고려사』전체의 3분의 1이 넘는다.770인이 입전()되었고, 다시 238인이 곁들여져 모두 1,008인의 기록이 수록되어 있는 거대한 전기집이다. 실제 열전의 분류 방식은『원사』와 가장 가까우며, 또한『송사』도 참조하였다. 우왕·창왕을 반역 열전에 넣은 것은 고려 말기 조선 건국자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조선건국의 합리화라는 정치적 목적이 반영된 것이다. 따라서 역사를 사실대로 기술한다는 원칙이 이 경우에 소홀해진 면이 있다.

열전에도『고려사』찬자들이 직접 쓴 서문이 있어 이를 통해 그들의 역사관과『고려사』에 대한 인식 태도를 알 수 있다.


(5) 논찬

논찬()의 원칙을 밝힌 범례에서는, 중국의 역대 사서에는 기·전·표·지의 말미에 찬자들이 사론()을 썼지만, 여기에서는『원사』에서 논찬을 쓰지 않는 방식을 취하되 남아 있는 이제현 등의 찬()을 세가에만 인용했다고 쓰고 있다. 실제 태조에서 숙종까지는 이제현의 찬(15편)을, 이후의 왕은 당시 고려실록 편찬자들의 찬(4편)과 정도전·정총 등의 ‘사신찬()’(14편)을 인용해 총 33편의 찬을 세가에만 싣고 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고려사』찬자들이 쓴 유일한 사론이 세계 말미에 붙여졌다.

또한 조칙()과 상소문은 그 내용을 분류해 각 지에 싣고 나머지는 세가와 열전에 실었다는 원칙 및 유가()의 문집과 잡록의 사적 중 내용이 있는 것은 뽑아 보탰으며, 제()·조()나 표·책의 글 중 내용이 없는 허사는 삭제했다는 원칙을 범례에서 밝히고 있다.

직서주의를 원칙으로 삼으면서도 고려 국왕의 연대 표기에서는 왕이 즉위한 해를 원년으로 칭했던 전통적인 관례가 유교명분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그 다음해를 원년으로 기술하였다. 이러한 유년칭원법()에 의한 기술은 당시의 금석문() 기록이나 문집의 기록과 1년의 연대 차이를 가져왔다. 또한 기전체로 사건 내용을 분류하여 기록함으로써 열전·지에서 정확한 연대를 기록하지 않거나 잘못 기록한 예도 적지 않다.

지는 편찬자들의 역사인식의 한계성으로 인해 고려의 정치제도와 풍속 등의 기술에서 잘못을 저질렀다. 즉 그것의 밑바탕에는 당·송나라 제도, 그리고 전통적인 유제()가 깔려 있는데,『원사』를 기준으로 하여 서술함으로써 전통적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나라 제도의 수용만으로 이해하였다. 형법지·식화지·병지들의 서문과 연월의 기록이 없는 기사의 서술에 있어서 사실과 다른 기술을 한 것은 이러한 예에 해당된다. 또한 지 가운데 예지 등은 평면적인 기술을 했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이는 당시 남아 있던『고금상정예문』을 그대로 전재한 데서 생긴 것으로 이해된다.

열전은『원사』를 준거로 하여 편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은일전()과 석로전()을 설정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자료가 없는 것이 아닌데도 이를 설정하지 않은 것은 젊은 수사관들의 인생관·종교관의 편협성과 조선왕조가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하는 유교국가였다는 점에 기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도교와 불교에 관련된 인물들을 의도적으로 입전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고려시대의 많은 문화 내용을 전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열전이나 지의 서술을 위해 민간 자료를 수집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점도 사료집으로서의 커다란 결함으로 지적된다. 비문이나 고문서·문집 등을 수집하려고 했다면, 현재의『고려사』보다 훨씬 풍부한 자료를 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고려사』편찬자들의 고려시대에 대한 역사관은 초기에는 당나라의 정치·군사·토지 제도를 받아들여 발전된 국가체제를 성립시켰으나, 무신정권으로 국가제도가 무너짐으로써 고려사회는 파탄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무신정권의 폐단은 고려 멸망의 원인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왕조가 건국-쇠퇴-멸망한다고 본 점에서 왕조순환사관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고려 전기를 긍정적으로 보고 후기를 부정적으로 기술한 것은 조선 왕조의 건국을 긍정적으로 파악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숭문주의()에 따른 무신에 대한 지나친 비판이라는 지적도 있다.

또한 그들은 역사를 움직이는 것을 왕과 왕의 정치를 보필하는 신하, 그리고 통치제도로 파악하였다. 이는 편년체를 쓴 역사가들의 역사관에 비해 역사를 보다 구조적인 측면에서 보려 한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역사관은 비록 지배자 중심으로 역사를 보았지만, 신하는 충직하고 현명한 자가 발탁되어야 한다고 본 점에서 고대의 군주 중심의 권위주의적 역사관보다 한층 발전된 것이었다. 요컨대 국가를 유지하려면 군주가 좋은 정치를 해야 하고, 좋은 정치를 하려면 신하의 충언을 받아들여야 하며, 국가를 유지하려면 군주는 외교관계를 잘 유지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찬자들의 역사관은 수사관의 공통적인 역사관으로서 넓게 말해 유교사관이라 할 수 있다.  고려사 [Goryosa, 高麗史]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