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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덕면 당우리 김판술기공비(周德面 堂隅里 金判述紀功碑)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주덕면 당우리 김판술기공비(周德面 堂隅里 金判述紀功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9. 1. 28. 19:50





주덕면 원당우에 위치한 부여사 앞에 자리하고 있는 전 국회의원이며 보사부장관을 지낸 김해인 김판술의 기공비입니다.



김판술은 민한당 국회의원. 보사부장관을 역임하였다.

전국회의원 전보사부장관 도암감공판술기공비(前國會議員 前保社部長官 道庵金公判述紀功碑)가 있다



김판술의 기공비옆에는 사당인 부여사를 건립할 때 의연금을 낸 종회와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김판술의 기공비는 서기 1995년 11월 14일 부여공파종회에서 건립하였다.


“公의 名은 判述이요 一名은 景培이고 雅號는 道庵이며 本貫은 金海인바 大司憲安敬公諱永貞이 爲顯祖이」고 一傳諱增壽는 通訓大夫 扶餘縣監이고 十一傳하야 有諱顯濚하니 公 卽其子也라 公이 一九0九年己酉」二月二十九日 全北 群山에서 出生하야 素以絶倫之資와 出等之才로서 樂善好義하고 向學嗜書하여 日本 京都帝大 農學部를 卒業 經營官하다 第七代 保健社會部長官을 歷任하셨으며 第三代 五代 十一代 國會議員」으로 當選되어 其能爛한 手腕과 活達한 風力으로 民生問題와 國政運營上 至大한 忠誠과 貢獻이 有할뿐만」아니라 爲先崇祖하는 精誠과 敬宗睦族하는 觀念이 丈益敦篤하야 扶餘祠 建立과 齋室 新築地域 補修와 石」儀排設 等 諸般事業에 巨大金額을 不惜喜捨하여 一新完成하였으니 基報本追遠之誠과 述先裕後之德이」足可以爲 一鄕之模範이요 金氏一門에 數多宗親이 相與議及하야 如斯嘉行을 立石永傳코자 要余爲記함」으로 難孤其誠일세 忘其不文하고 略述如石로다.
駕洛紀元一九五四年乙亥九月二十二日
成均館原任典學光山金容肅 謹撰
順興安根濬 謹書”
우측면에는 ‘西紀一九九五年十一月十四日 扶餘公派宗會 謹立’ 이라 기록하였다.


김판술은(1909∼2009.) 대한민국의 관료·정치인이다.

전라북도 옥구군(현 군산시) 광면 신풍리 출생으로, 호는 도암(), 본관은 김해이다. 군산공립중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하였고, 1937년 교토대학교[] 농화학부를 졸업하였다.

이리농사시험장 책임자를 거쳐, 1948년부터 농림부 농정과 과장으로 근무하다가, 정치에 입문하였다.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군산·옥구 지역에서 민주국민당 소속으로 당선되었다. 1955년 9월 민주당 창당과 함께 농민부 차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58년부터는 민주당 산업부 부장으로 활동하였다.1960년 민주당 소속으로 제5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민주당의 신파로, 1961년 민주당 내 합작파 의원들로 구성된 정안회()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61년 1월 장면 내각에서 나용균 장관의 후임으로 제7대 보건사회부 장관에 임명된 후, 5·16 군사정변으로 사퇴하였다.

정치 연금이 해제된 후, 다시 정치활동을 시작하여 1963년 민주당 기획위원 겸 정책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허정을 중심으로 창당된 신정당의 발기준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65년 5월 윤보선을 중심으로 창당되었던 민정당과 민주당이 연합하여 민중당이 창당하자, 12월 유옥우의 사퇴로 공석이 된 민중당 중앙상무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1967년에는 신민당 창당에 참여하여 신민당 지도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68년 6월 신민당 중앙상무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69년 7월 삼선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 군산·옥구 지역구 신민당 후보로 내정되었다가 교체되기도 했으며, 1978년에는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무소속으로 군산·옥구 지역구에 출마하였다가 낙선하였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소속으로 종로·중구 지역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이종찬과 함께 최고령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민주한국당 자문회의 의장, 민주한국당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1984년 12월 민주한국당 종로지구당위원장을 사퇴하였고, 1985년부터는 민주한국당의 상임고문으로 일선에서 은퇴하였다.

이후 김대중이 창당한 평화민주당 고문 및 당무지도위원회 의장직을 맡았으며, 1991년부터는 민주당의 당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 밖에 군산중고등학교 동창회 회장, 우진학원 이사, 국토통일원 고문, 제1차 국제침구학술대회 대회장, 운석 장면 박사 기념회 이사, 한국장례문화연구회 회장직 등을 역임하였으며, 2009년 3월 31일 향년 100세로 사망하였다. 김판술 [Kim, Pan-sul, 金判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