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사인암각자 - 조병현,김조연,김기명,이복신,(舍人巖刻字 - 趙秉鉉,金祖淵,金箕明,李福信)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단양군(丹陽郡)

사인암각자 - 조병현,김조연,김기명,이복신,(舍人巖刻字 - 趙秉鉉,金祖淵,金箕明,李福信)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9. 2. 10. 06:17






조병현(趙秉鉉)은 1791(정조 15)∼1849(철종 즉위년).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풍양(). 자는 경길(), 호는 성재()·우당(). 조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진명()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조득영()이다. 어머니는 이문원()의 딸이다.

1822년(순조 22)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지평·교리를 거쳐 1827년 암행어사가 되었다. 그 뒤 조만영()·조인영()·조병구() 등과 함께 풍양 조씨 세도정치의 중심 인물이 되어 안동 김씨()와 권력 다툼을 벌이는 데 앞장섰다. 1832년 세자시강원의 겸보덕(), 이듬해에는 공충도관찰사·경상도관찰사를 거쳐 1838년(헌종 4) 예조판서에 올랐다.

다음 해 병조판서·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에 올랐다. 이 때 그는 안동 김씨를 배척하였던 실권자로서 천주교를 탄압, 앵베르(Imbert, )주교와 샤스탕(Chastan, )·모방(Maubant, 祿) 신부 등을 비롯한 많은 신자들을 살육하는 기해박해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1840년에는 호조판서로 전임하여 『동문휘고()』 편찬 때 교정당상()을 겸하였다.

그 뒤 이조판서·판의금부사를 거쳐 1844년 좌참찬에 올랐다가 과거부정사건에 연루되어 평안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그 뒤 병조판서·규장각제학·예조판서·홍문관대제학 등을 지내고, 1847년 광주부유수()가 되었다. 이 해 안동김씨파의 정언 윤행복(), 대사헌 이목연() 등의 탄핵상소를 받아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이듬해 유배에서 풀려나게 되었으나 정언 강한혁(), 대사헌 이경재() 등의 탄핵을 받았으며 1849년 6월 철종의 즉위로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하자 다시 전라남도지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그 해 9월 사사되었다. 저서로 『성재집()』이 있다.


김조연(金祖淵)은 연안인으로 군수를 지낸 김반(金盤)의 아들이다.

자(字)는 요부(堯夫)이며 계사(癸巳) 1773년 (영조 49)에 출생하였다.

[생원] 정조(正祖) 19년(1795)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20위(50/103) 급제하였다.

덕천군수등을 거쳐 충주목사를 지냈다.처부(妻父)는 목사를 지낸 서간수(徐簡修)이다.


김기명(金箕明)은 광산(光山)인으로자는 자소(自昭)이며 갑오(甲午) 1774년 (영조 50)에 출생하였다.

진사시로 급제하였다.관직은 부사(府使)에 이르렀으며 연기현감을 지냈다.

 아버지는 통훈대부(通訓大夫) 전행곡성현감(前行谷城縣監)을 지낸 김상엄(金相儼)이다. 


이복신(李福信)은 1808년(순조 8)~미상. 조선 후기 문신. 자는 유여(留餘)이다,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출신지는 한양(漢陽)이다. 증조부는 이연(李演)이고, 조부는 이병모(李秉模)이다. 부친은 예조판서(禮曹判書) 자헌대부(資憲大夫) 이노익(李魯益)이고, 모친은 심풍지(沈豊之)의 딸이다. 생부는 이노직(李魯直)이다. 부인은 김리재(金履載)의 딸이다. 형은 이돈신(李敦信)이고, 동생은 이석신(李錫信)이다.
1828년(순조 28) 식년시에 진사 3등 38위로 합격하였고, 1829년(순조 29) 정시에서 병과 21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1828년(순조 28) 추도기유생(秋到記儒生) 시험 때 제술(製述)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직부전시(直赴殿試)되었다. 영부사(領府事)를 역임했던 이병모의 서자 이노근(李魯近)과는 친숙질(親叔姪) 사이인데, 이노근은 적가(嫡家)를 원수처럼 여긴 인물이다. 이노근은 적가에서 쫓겨나고 족보에서 삭제를 당한 것에 원한을 품고 적질(嫡姪)인 이복신을 모해하고자 흉서(凶書)를 지어내어, 1829년(순조 29) 과거시험지에 썼는데, 봉내(封內)할 때 이복신과 형제, 친인척의 이름을 나열해서 답안지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이노근은 죄가 알려지면서 사형을 당하였다. 임금이 이복신의 연좌 여부를 하문할 때 영돈녕(領敦寧) 김조순(金祖淳)‧판부사(判府事) 남공철(南公轍) 등이 연좌하지 말 것을 청하면서 혐의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특별히 연좌를 모면한 은혜를 입었는데도 가주서(假注書)가 된 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직무를 유기하였다가 유배시켰다.


그외에도 李憲䍖(이헌부)  이연부(李延䍖)  이기정(李基貞)등의 이름이 각자되어있다.

이기정(李基貞)은 고종실록28년(1891년) 승정원일기에 이름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