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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암각자 - 김문순(舍人巖刻字 - 金文淳)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단양군(丹陽郡)

사인암각자 - 김문순(舍人巖刻字 - 金文淳)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9. 2. 9. 09:11


사인암벽에 각자된 김문순(金文淳)이라는 각자입니다 옆에는 계묘중추(癸卯仲秋)라고 적혀있습니다.

계묘년은 김문순의 행적과 비교하면 1783년이다.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시절 가을에 사인암에 들려 각자(刻字)한것으로 추정된다.




김문순(金文淳)은 1744(영조 20)∼1811(순조 11).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재인(在人). 고조부는 김창집(金昌集)이고, 할아버지는 김준행(金峻行)이며, 아버지는 김이신(金履信)이다.


1767년(영조 43) 정시 문과에 장원 급제해 정언이 되었다. 이듬해 겸문학이 된 뒤 홍문관교리·지평·문학·사서를 거쳐 1773년 벼슬한 지 7년 만에 당상관에 올라 승지에 임명되었다.

1779년(정조 3) 대사간이 되었으며 좌승지·이조참판·대사헌을 거쳐 1782년 다시 이조참판이 되었다. 노론인 김문순은 남인인 지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의 죄를 논하고 유배시킬 것을 주장하다가 오히려 파직당하였다.

그러나 곧 기용되어 충청도관찰사가 되고 1784년 동지경연사에 이어 공조참판이 되었으나 채제공과 뜻이 맞지 않아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였다.

1789년 이조참판에 이어 형조판서가 되었는데, 이듬해 강화 죄수의 처결을 지체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가. 그러다가 곧 예조판서로 기용되어 다시 형조판서를 거쳐 한성판윤이 되었다. 1791년 평시서제조가 되었으며 이듬해 이조판서·예조판서를 거쳐 다시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 때 평택현감 이승훈(李承薰)이 천주교인으로서 향교의 문묘에 알성(謁聖)할 때 무릎을 꿇지 않았다. 이에 여론이 분분했지만 처벌하지 않아 금갑도(金甲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으며, 곧 풀려나 다시 한성판윤이 되었다.

1796년 경기도관찰사를 지낸 뒤 이듬해 동지 겸 사은정사(冬至兼謝恩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00년(순조 즉위년)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칙사(勅使)를 맞이하고 1802년 평안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순조 즉위 후, 국구(國舅)인 김조순(金祖淳)을 중심으로 김희순(金羲淳)과 함께 안동 김씨 세도의 중심 인물이 되어 김씨 세도정치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1804년 수원유수, 1806년 판의금부사에 이어 이조판서·선혜청당상·우참찬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