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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암각자 - 오수원,오수채,오명관(舍人巖刻字 - 吳遂元,吳遂采,吳命觀)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단양군(丹陽郡)

사인암각자 - 오수원,오수채,오명관(舍人巖刻字 - 吳遂元,吳遂采,吳命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9. 2. 8. 08:51

 

오수원(吳遂元) 오수채(吳遂采) 오명관(吳命觀)은 관향이 해주(海州)이므로 해주오씨(海州吳氏)이다. 오수원은 고려시대에 문과(文科)출신이며 오수채(吳遂采) 오명관(吳命觀)은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로 벼슬길에 올랐던 인물이다.

 

 

 

오수원(吳遂元)1682년생이며  숙종 38년인 1712년에 그의 나이 31세에 정시(庭試)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라 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

그의 부친은 오도일(吳道一)이며 조부는 오달천(吳達天)이다.

 

오수채(吳遂采) 1693~1759)는 숙종9년에 태어나 영조 35년까지 활동을 하였던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사수(士受), 호는 체천(棣泉)이며 오도일(吳道一)의 아들이다. 음보로 주부(主簿)가 되고, 1735(영조 1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수찬(副修撰교리(校理이조좌랑·수찬·검토관(檢討官부응교를 거쳐 1741년 승지에 이르고 이듬해 대사간이 되었다. 1748년 부제학, 1753년 대사성(大司成)에 이어 예조참판에 승진하였으며 이어서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이듬해 대사간·대사헌(大司憲부제학·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지냈으며, 이후 개성유수를 거쳐 1758년 대사헌에서 관직을 떠났다. 일찍이 이돈(李燉엄집(嚴緝)이 증수한 송도지(松都誌)1757년에 속지(續志) 1권을 증보(增補)하여 펴냈다.

 

오명관(吳命觀))1699년생이며 아버지는 내시교관(內侍敎官)을 역임한 오수원(吳遂元)이다. 경종(景宗) 3년인 1723년에 증광시(增廣試)로 벼슬길에 올랐으며 군수를 지냈다.

 

 

 

 

 

오도일의 영정(1645~1703. 조선 후기의 문신)

 

오도일(吳道一)1645(인조 23)∼1703(숙종 29).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오수원과 오수채의 아바지이다.

본관은 해주(). 자는 관지(), 호는 서파(西). 선공감역() 오희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오윤겸()이고, 아버지는 오달천()이다. 어머니는 조간()의 딸이다.

1673년(현종 14) 춘당대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680년(숙종 6) 지평·부수찬, 1683년 지제교()를 거쳐 1687년 승지가 되어 자파()를 옹호하다가 파직되었다. 1694년 개성부유수를 거쳐 주청부사(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대사간·부제학·강원도관찰사에 이어 다시 부제학을 거쳐, 1696년 도승지·부제학·대사헌을 지냈다. 다음해 예문관제학·사직·이조참판, 1698년 이조참판·공조참판을 지내고 양양부사로 좌천, 삭출()되었다가 1700년 대제학·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고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1702년 민언량()의 옥사에 연루되어 장성에 유배되었다. 특히, 문장에 뛰어나 세칭 동인삼학사()라 하였으며, 술을 좋아하여 숙종으로부터 과음의 경계를 받았다. 죽은 뒤 복관되고 울산의 고산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서파집』이 있다.

 

오수원(吳遂元) 오수채(吳遂采) 오명관(吳命觀)의 관계를 살펴보면 오도일(吳道一)의 아들이 오수원(吳遂元) 오수채(吳遂采)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친 형제간이며 오수원(吳遂元)의 아들은 오명관(吳命觀)이다. 그러므로 오수원(吳遂元)과 오명관(吳命觀)은 부자지간(父子之間)이며 오수채(吳遂采)와 오명관(吳命觀) 하고는 숙질(叔姪)관계이다. 이 세 사람이 사인암을 찾아서 유람하면서 각자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