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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백면 은탄리 태실(文白面 銀灘里 胎室)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진천군(鎭川郡)

문백면 은탄리 태실(文白面 銀灘里 胎室)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9. 3. 6. 18:33



은탄리에 태실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리저리 수소문하며 은탄리 태실을 찾아보려 노력을 했습니다.

모처럼 시간을 내어 태실이 있다는 진천군 문백면 도룡마을 을 찾았습니다.

 


사진 저 뒤로 보이는 산이 태실이 있다는 태봉입니다.

마침 마을회관에서 나오시는 어른이 있어 태실에 대해서 여쭤 보았습니다

이 도룡마을에서만 50여년을 사셨다는 유기석 어른 이십니다.



혼자서는 찾을수도 없으며 지금은 태실의 흔적도 없다고 말씀을 해주시네요

젊은시절 태실의 흔적은 볼수 있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 흔적마저도 스러졌다고 합니다.



사진 한장 찍어 드릴까요? 하니 환한 얼굴로 대답을 주십니다.



태실과의 작은 인연이 있어 절의 이름도 태봉사인 듯 합니다.



텅빈 절의 모습이 참 안타깝습니다.

텅 빈 태봉사의 모습처럼 태실 또한 우리들의 기억속에서 스러지겠지요.


은탄리는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에 속하는 법정리입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생긴 이름으로, 은탄리(銀灘里)는 은성(銀城)과 갈탄(葛灘)에서 한 자씩 따서 생긴 지명이다.


은탄리는 본래 진천군 백락면 지역이었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정책에 따라 은성리·갈탄리·취라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은탄리라 명명하였다.

양천산[350m]과 불당산[288m]으로 뻗어 있고 동쪽에는 미호천이 흐른다. 미호천 주변의 모래사장과 절벽의 경치가 매우 수려하다. 기후는 온난하고 수량은 풍부하다.

진천군청에서 남서쪽으로 약 15㎞ 떨어져 있다. 2009년 8월 31일 현재 면적은 9.50㎢이며, 조사당시 총 126가구에 254명[남자 122명, 여자 132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은성·갈탄 등의 마을이 있으며, 주요 산물로 평야지대에서는 쌀을, 구릉지에서는 완사면을 이용한 고추·콩·과수 및 가축 사육 등을 하고 있다. 동쪽에 흐르는 미호천 주변으로는 풍치가 좋아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다.

충청북도 학생종합야영장과 충청북도 학생 외국어교육원이 있다







태는 임신한 여성의 자궁 안에서 자라나는 아이에게 생명을 전해 주는 실체이다. 새로운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태는 생명 탄생의 신비와 더불어 예부터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태를 처리한 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20세기 중반까지도 사람들은 태를 불에 태우거나, 물에 띄워 보내거나, 땅에 묻는 방식으로 처리하였다. 대체로 불에 태우는 방식을 선호하였고, 태를 땅에 묻는 장태(藏胎)는 지역별, 계층별로 상당히 제한된 사례에만 적용되었다.

태를 매장하는 관습은 그 역사가 6세기 후반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김유신의 부모가 김유신의 태를 묻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 뒤 사람들은 김유신의 태가 묻힌 곳을 태령산(胎靈山)이라 불렀고, 이곳을 신령하게 여겨 김유신의 사우를 세우고 봄가을로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이후 조선시대 사람들은 태를 묻는 관습이 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사이에 시작되었으며, 중국에는 없는 우리 고유의 풍습이라고 여겼다[『선조수정실록』 3년 2월 1일].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태장경(胎藏經)』의 장태법을 따라, 좋은 땅을 가려 자녀들의 태를 묻었다. 태를 좋은 땅에 묻으면 태의 주인이 오래 살고 지혜롭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특히 왕이나 원자, 원손과 같이 왕위를 계승할 자손의 경우, 조선 왕조의 흥망성쇠가 그 태에 달려 있다고 여겼다.

또한 당나라 때의 승려 일행(一行)이 고안한 육안태법(六安胎法)의 영향을 받아, 남자아이는 태어난 지 5개월, 여자아이는 3개월이라는 기준에 맞춰 자녀의 태실을 조성하였다. 왕위 계승자인 원자나 원손의 경우에는 특히 그 기준을 벗어나지 않으려 했으나, 그 외 왕실 자녀의 경우에는 태실을 조성하는 시기가 늦춰지는 사례도 많았다.

태조이성계는 자신의 태를 묻을 좋은 땅을 찾기 위해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권중화(權重和)를 지방으로 파견하였다. 1393년(태조 2) 1월 2일, 권중화는 전라도 진동현(珍同縣)에서 태를 묻을 길지를 찾은 다음 태조에게 산수 형세도를 바쳤다(『태조실록』 2년 1월 2일). 태조는 1월 7일에 다시 권중화를 보내 이곳에 태실을 조성하게 하였다. 그리고 당시 완산부에 속해 있던 진동현을 진주(珍州)로 승격시켰다. 태조의 태실은 조선시대 왕실에서 처음으로 조성된 것으로, 왕실에서 태실을 조성하는 기본적인 틀을 제공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평상시에 태실 증고사를 지방에 파견하여, 태실을 조성하기에 좋은 땅을 미리 찾도록 하였다. 태실 증고사는 전국을 다니며 찾은 태실 후보지를 모두 세 등급으로 나누어 장부에 기록해 두었다. 태실 후보지를 찾아 그 길함의 정도에 따라 세 등급으로 나누어 기록해 두었다가, 왕위 계승자인 원자와 원손은 1등 태봉에 태를 안치했다. 왕비 소생인 대군과 공주는 2등 태봉, 후궁 소생인 왕자와 옹주는 3등 태봉에 태를 안치했다. 왕실에서는 태실을 조성할 좋은 땅의 조건으로 높고 정결한 곳을 선호하였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들판 가운데 둥근 봉우리를 택하여 그 위에 태를 묻어 보관하고, 이를 태봉이라 불렀다[『현종개수실록』 11년 3월 19일].

그리고 왕실의 태실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태실 주변의 일정한 거리를 금지 구역으로 설정하고 금표(禁標)를 세웠다. 왕의 태봉은 1등급으로 300보, 대군의 태봉은 2등급으로 200보, 왕자의 태봉은 3등급으로 100보로 정하였다. 금표 안에서는 농사를 짓거나 나무를 베는 행위를 금하였으며, 금지 구역에 속한 집이나 밭은 해당 주인에게 보상을 한 뒤 철거하였다. 또 태실을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해 태실을 수호하는 태봉지기를 선발하여 철저히 보호하게 하였다. 이를 어겼을 경우에는 해당 백성을 엄하게 처벌했을 뿐 아니라, 태봉의 관리를 소홀히 한 태봉지기와 지방관도 함께 벌하였다.

한편, 태실의 주인이 왕으로 즉위하면 태실 주변에 난간석과 비석 등을 새로 조성하는 의식인 태실가봉(胎室加封)을 하였다. 태실가봉에는 많은 인원과 물품이 필요하였다. 특히 석재를 구하여 태실이 위치한 태봉까지 옮기는 데 많은 인력이 동원되었다. 그 때문에 태실가봉은 흉년을 피해서 주로 농한기인 가을 추수 후에 이루어졌다. 왕의 태실을 가봉한 뒤에는 태실을 보호하기 위한 금표도 200보에서 300보로 거리를 늘려 세우고, 수호하는 군사의 정원도 2명에서 8명으로 증원하였다. 태실가봉이 끝나면 『태실가봉 의궤』를 제작하였고, 태실가봉 후의 모습을 그린 태봉도(胎封圖)를 왕에게 바쳤다.

태실가봉은 태실 주변에 석난간·개첨석·중동석·상석·전석·표석·귀롱대(龜籠臺) 등과 같은 석물을 조성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천문과 지리 등을 맡아본 관상감과 토목과 영선을 맡아본 선공감에서 주로 담당했으나, 대부분의 인력과 물품들은 태봉이 위치한 인근 지방의 협조를 통해 조달하였다. 태실을 가봉할 때 가장 중요하고도 힘든 일은 석물을 조성하기에 적합한 돌을 구해 태봉 주변까지 옮기는 일이었다. 석재는 대개 한양에서 활동하는 석수인 경석수(京石手)를 파견해 태봉 근처에서 구하도록 했으나, 여의치 않을 경우 충주와 같이 좋은 석재가 많이 나는 지방에서 옮겨 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