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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량면 대전리 내동리사지 석탑부재(東良面 大田里 內洞里寺址 石塔部材)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동량면 대전리 내동리사지 석탑부재(東良面 大田里 內洞里寺址 石塔部材)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9. 4. 16. 11:06

 

 

대전리 내동마을에 있는 내동리사지에 있는 탑의 몸돌입니다.7-8개(몸돌,옥개석)가 주위에 있었다고 하니 최소한 삼층석탑이상인 듯 합니다.하나만 남기고 밤농장 조성시 장비기사에 의해 반출되었다고 합니다.지금은 사지가 모두 경작지인 밤농장으로 변하여 있으며 밤농장 조성시 다수의 와편이 발견되었다고 하며 지금은 탑의 몸돌하나 외롭게 절터를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한국의 사지에 의하면 용두사지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용두사는 『牧隱集』과 『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을 통 해 삼국시대에 창건되어 조선중기 경까지 존속되었음을 알 수 있고, 『梵宇攷』의 기록으로 보아 폐사시기는 18세 기 이전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용두사는 末訖山 밑에 있고, 이곳에는 법 경대사자등탑비(보물 제17호)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법 경대사자등탑비는 이곳에서 동쪽으로 약 15㎞ 떨어진 정 토사지에 남아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사지가 용두사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현재로서는 입증할 만한 다른 자료가 없다.

 

 

 

용두사지는 용천사의 남동쪽 계곡 중턱에 위치한다. 이곳은 ‘절골’이라고 불리는 곳에 있고, 남서쪽으로 약 700m 떨어진 곳에는 永慕祠(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9 호)가 있으며, 용두사지와 영모사의 중간 지점에는 충주 대전리 최개국 묘가 있다. 영모사는 충주최씨의 시조 인 崔陞 등 선조 8위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신라말기 에 지어졌다고 한다. 1982년 자료에 의하면 1980년에 관동대학교 학술조 사단이 이곳을 조사하면서 0.7m 정도되는 석축과 가로 80㎝, 세로 60㎝의 받침돌 2개, 비천상이 조각된 기와 를 찾았다고 한다. 또한 오래전부터 ‘절골’이라고 불렸으 며 초석과 석축석재로 추정되는 석재들이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1998년 자료에서도 석축 일부와 기와편 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추정사역은 과수원(밤나무)이 조성되어 있고, 이로인해 삭토가 많이 이루어졌으며, 지형변화가 심한 것으로 보인다. 과수원 주인의 전언에 의하면 과수원은 약 10년 정도 전에 조성되었고, 과수원을 조성하면서 다량의 유물과 석탑 탑신석 5매가 확인되었다고 하나 현재 탑신석 1매만이 남아 있다. 나머지 석탑재들은 공사 중에 반출되었다고 한다. 기존 자료에서 언급된 석축은 확인할 수 없 었고, 석탑 탑신석 1매는 347번지 부근에 있다. 유물은 석탑 탑신석의 북쪽 경작지(깨밭)에서 다량으로 산포되어 있고, 대부분 어골문 와편이다. 이외에도 종선문, 거 치문, 수파문 와편과 토기편, 백자편이 있다.

 

 

하나 남은  탑신석은 전체 너비 69㎝, 높이 58㎝ 로 너비 18㎝의 우주가 표현되어 있다.

용두사지는 『牧隱集』과 『新增東國輿地勝覽』, 『梵宇攷』 의 기록을 통해 사명과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운영 되었고, 폐사시기는 18세기 이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그러나 『新增東國輿地勝覽』의 <법경대사자등탑비>에 대한 기록은 현재 상황과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잘 못된 기록일 것으로 판단된다. 사지는 과수원 조성으로 인해 지형변화가 심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고, 이로 인해 사지와 관련된 유구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유물 과 석탑 탑신석만이 남아 있다. 사찰의 운영시기는 문헌 기록과 유물의 양상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18세기 이전 까지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