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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덕읍 사락리 이덕량묘비(周德邑 社樂里 李德樑墓碑)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주덕읍 사락리 이덕량묘비(周德邑 社樂里 李德樑墓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9. 9. 11. 15:31




[전주이씨입향조이덕량묘소]



사진에서 왼쪽에 있는 비석이 입향조 리덕량의 묘비이다,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 엄동 60-2번지에는 전주리씨 진안대군 후손들의 묘소가 산재해 있다. 음동마을회관(경로당)이 있는 아랫말 뒷산 서향(西向)한 넓은 골짜기에 입향조 리덕량(入鄕祖李德樑)을 비롯한 다섯 기의 묘소가 있다.
전주리씨 진안대군 후손들이 제내리 풍덕(堤內里豊德)마을에 시거하고 묘를 쓰게 된 연유를 살펴보면, 입향조 참의공 리덕량(入鄕祖參議公李德樑)이 용사지란(龍蛇之亂, 壬辰倭亂)의 병화(兵禍)를 당하여 괴산군 감물면 대상동에서 17세 때에 노구의 아버지를 업고 6세의 어린 동생을 앞세우고 피난 중에 여러 곳을 다니며 살 곳을 찾다가 돌림병으로 부모가 같이 돌아가셨다.



이 때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묘자리를 잡지못하고 있었는데 저녁에 과객이 들어서 하룻밤 쉬어가기를 청하였다. 저녁밥을 지을 곡식이 없어 죽을 쑤어 과객을 대접하면서 ‘보시다시피 집안이 곤궁하여 대접이 소홀합니다.’라고 하자 과객이 이르기를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보아하니 상을 당하신 것 같은데 묘자리는 잡으셨는지요? 잡지 못하셨으면 제가 아는 것은 부족하지만 보아드릴 수는 있습니다.’라고 했다.
다음날 감여가(堪輿家, 풍수쟁이)를 데리고 답산 도중(踏山途中)에 덕면황금곡리(德面黃金谷里) 황금산(黃金山)에 도달하여 좌정한 지관이 말하기를 ‘이곳이 명당(名堂)이지만 또 한군데 명당이 있다면서 앉으면 안 보이고 서면 보이는 곳인데 옥관자(玉貫子) 세 말 자리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그 곳은 후손들이 발복하여 벼슬아치가 많이 나오는 묘자리인 것이다. 그 곳도 가르쳐 달라고 하니까 지관이 말하기를 ‘욕심이 너무 과하시다면서 이 자리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으로서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으로 백자천손 만대번연 청조가성지지(百子千孫 萬代蕃衍 靑鳥佳城之地)이니 한군데만 선택하라’고 하니 자손번창함이 좋을 것으로 생각하여 이곳을 택하였다고 한다. 다섯 기의 묘가 있는 이곳을 후손들은 ‘큰능산소’라고 부른다.



비석에는 증통정대부호조참의전주이공휘덕량지묘배숙부인초계정씨합부(贈通政大夫戶曹參議全州李公諱德樑之墓配淑夫人草溪鄭氏合祔)라고 적혀있다.


리덕량(李德樑 : 1576~1651)은 전주리씨 진안대군 자손 중 방호파의 입향조(入鄕祖)이다. 괴산군 감물면 대상동에서 태어나 임진왜란을 피해 현재의 제내리 앞 요도천 변에 있는 진개(陣浦)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진개는 물가여서 홍수로 인한 피해가 크고 살기에 적당치 않아 마을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 당시 자리 잡은 곳이 비석동산 앞쯤으로 추측된다. 그것은 리덕량의 아들인 리정지의 묘갈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공(리정지 : 편집자 주)이 돌아가신 뒤 이십 육년 되던 해인 병신에 공의 구택 후원 간좌 언덕에 면봉하였다.” 이곳에서 아들 3형제를 낳아 키웠으며 이들이 정지, 정명,정협이다.
제내리(방죽안)에 자리잡은 후 아버지인 리식(李軾)의 묘를 사락리 음동 황금산 아래 금계포란형의 자리(사진)에 썼다. 이 자리를 잡아 준 지관은 이곳이 ‘아들을 백 명이나 얻고 손자를 천 명이나 얻으며, 만대가 번창하고 푸른 새가 아름다운 성을 지을(百子千孫 萬代蕃衍 靑鳥佳城)’ 땅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손자 대에 이미 부와 명예를 얻었고, 방죽안 마을의 전통과 명성은 최근까지도 꾸준히 이어져 오고 있다. 리덕량은 손자인 진열(震說)이 높은 벼슬을 해서 호조참의를 추증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