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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덕읍 사락리 충주목사이국헌묘지(周德邑 社樂里 忠州牧使李國憲墓地) 본문
원사락 아랫담 뒷산에 있는 조선조 충주목사를 지낸 연안인 이국헌의 묘지입니다.
산소앞에 서있는 비는 2004년 4월 11일 후손들에 의해 세워졌다. 비문은 “증 통정대부 충주목사 연안이공 국헌지묘(贈 通政大夫 忠州牧使 延安李公 國憲之墓), 배숙부인 전주이씨부(配 淑夫人 全州李氏祔)”라고 새겨져 있다. 망주석은 돌이끼가 돋아난 것으로 보았을 때 꽤 오래된 것 같은데 위 부분의 조각이 정교하게 잘 남아있다.
이국헌의 묘지에는 상석과 후손들에 의해 근간에 세워진 비석과 망주석2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국헌에 대한 묘 주변의 구전(口傳)에 의하면, 충주 목사(忠州牧使) 재임시(1691∼1692) 청렴결백(淸廉潔白)한 청백리(淸白吏)로 애민선정(愛民善政)을 하였는데 6방관속(六房官屬)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엄격히 통제하니 불만이 팽배하였다고 한다. 이 무렵 목사는 매일 아침 식사 전에 지내 생즙(生汁)을 마신 후 해독제로 날밤(生栗)을 꼭 먹었는데, 급기야 관속들이 날밤 대신 버드나무를 밤 모양으로 깎아 올리니 이것을 깨물다 말고 피를 토하고 즉사하였다고 한다.
그 후 이목사(李牧使)의 아들이 충주목사로 부임하여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한풀이로 6방 관속들을 덕면 황금곡리 황금산(德面 黃金谷里 黃金山)으로 부역을 강제 동원하였다. 이국헌의 묘 뒤가 허(虛)하니 산봉우리를 쌓도록 시키면서 양식도 제대로 주지 않고 계속 일을 시켰다. 이에 부역 중에 굶어 죽은 사람들이 속출했다고 한다. 이렇게 인력(人力)으로 만들어진 이국헌 묘 뒤의 작은 봉우리를 지금까지도 인봉(人峰)이라고 전해 내려온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묘를 만들 때 모인 사람들이 산을 뒤덮어 인봉(人峰)이 생겼다고 그렇게 부른데서 생긴 말이라고도 한다.
충주목사 이국헌에 대한 조선왕조실록 숙종(肅宗) 17년(1691) 7월 13일(丙寅)기록을 보면, 병인일에 호조판서(戶曹判書) 오시복(吳始復)이 왕에게 아뢰기를, “기유년에 충주 가흥(可興)에 의창(義倉)을 설치하였는데, 계해년에 충주를 독자 진영으로 삼으려고 그 창고를 주 소재지에서 6,7리 떨어져 있는 양진으로 옮겨서 이름하여 양진창(揚津倉)이라 하였습니다. 단지 그 땅이 낮고 축축하여 곡식을 저장하기에 적합하지 못하고, 창고 근처의 모집한 백성도 흩어졌으므로, 이제 목사 이국헌이 그 창고를 주의 소재지와 금천(金遷)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대신들에게 물어서 허락하여야 하겠습니다.”하였는데 대신들도 그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충주시 용관동에 위치하고 있는 이국헌의 마애비입니다
괴산군 불정면에 있는 남창부락에 위치한 이국헌의 불망비입니다.
충주시 신니면 학성마을 버스정류장에 마을유래비와 서있는 이국헌의 선정비입니다.
충주시 노은면 연하리 논둑에 위치하고 있는 이국헌의 불망비입니다
충주시 신니면 용담사에 있는 이국헌 선정비입니다 미륵불표지석으로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음성향교 앞에 선정비군에 서있는 이국헌의 불망비입니다.
소이면 비산리에 있는 이국헌청덕선정비
또 숙종 19년(1693) 5월 18일(신유)조에 보면6), “아침 강론 때 충주의 죄수를 서울의 옥으로 잡아와서 엄중히 신문하여 처단하도록 명하였다. 대개 충주 아전들의 습관이 매우 사나워서 목사(牧使) 윤가적(尹嘉績)과 이국헌이 모두 갑자기 죽었기에 이국헌의 아들이 소장을 올려서 그 의심스러운 여섯 사람을 가두었다. 그 뒤 목사 엄찬(嚴纘)이 또 욕을 듣는 봉변을 당하여 그 사람을 때려죽이고 이로 인하여 교체되어 돌아왔었다. 이현일(李玄逸)이 경연에서 엄찬의 업적을 아뢰니 임금이 그대로 유임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목내선(睦來善)의 말로 인해서 이러한 지시가 있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목사 이국헌의 선정비가 용원저수지 공사 이전에는 충주군 신니면 화점막교 주막 도로변(忠州郡 薪尼面 花店幕橋 酒幕 道路邊)에 있었다고 한다. 저수지가 만들어진 다음, 1948년경에는 충주군 신니면 용원저수지 뚝 아래 우측 간선수로 입구 중간 지점뚝에 서 있었는데 뒤에 가서 확인하니 무너미 개울 뚝 안쪽에 엎어져 있었다.
원래 비석에는 “목사이공국헌청덕애민선정비”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2005년 4월 14일 답사 결과 용담사(龍潭寺) 경내로 옮겨 ‘미륵불’ 이라고 새겨서 안내 표지석으로세워 놓았다. 현재 ‘미륵불’를 새긴 자리의 글자는 알아보기 어렵고 우측의 ‘…곡면(谷面)’과 좌측의 신미(辛未) 十一月 立은 확실하게 보인다. 신미년은 숙종17년(1691)으로 이국헌이 충주목사로 재임시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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