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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사이서구영세불망비(觀察使李書九永世不忘碑) 본문
관찰사이서구영세불망비(觀察使李書九永世不忘碑): 1882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서구[1754~1825]는 조선시대 문신으로 자는 낙서, 호는 척재이다. 1793년(정조 17)과 1820년(순조 20) 두 차례 전라관찰사를 지냈으며 남원군 수지면 견두산 주변에서 잦은 재변이 일어나자 견두산을 제압하도록 호석을 남원부 중에 세워 재난을 막았다. 일설에 판소리 단가 「호남가」를 지어 전라도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고 전라도민을 사랑하였다고 전한다.
이서구는 조선후기 평안도관찰사, 형조판서, 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문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낙서(洛瑞), 호는 척재(惕齋)·강산(薑山)·소완정(素玩亭)·석모산인(席帽山人). 아버지는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을 증직 받은 이원(李遠)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된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부사 신사관(申思觀)의 딸이다. 계비(繼妣)는 역시 정경부인이 된 진주 이씨(晉州李氏)로 이한복(李漢復)의 딸이다.
1758년(영조 34) 이서구의 나이 5세 때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는 외할머니에게서 자랐으며 외숙(外叔)으로부터 당시(唐詩)·『사기』·『통감(通鑑)』 등을 배웠다.
외가에서 7년을 지내고 12세가 되던 1765년(숙종 1) 아버지에게로 돌아와 경전(經典)을 읽기 시작했다. 16세부터는 문장가 박지원(朴趾源)을 만나 글 쓰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1770년(영조 46)에는 귀양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잃었다. 이때까지 그는 일정한 스승이 없이 글을 배웠으며 금석(金石)·육서(六書) 등에 대해 두루 수업을 받았다.
그는 21세 되던 1774년(영조 50) 가을에 정시(庭試) 병과에 제16인으로 뽑혔다. 10월에 섭기주(攝記注)로 첫 벼슬을 받았다. 22세 때인 1775년(영조 51)부터는 약 6년간 오로지 학문에만 뜻을 두었다. 특히 역사책을 깊이 공부했다. 그 해에 이덕무 등과 함께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에 참가함으로써 사가시인(四家詩人 : 이서구·이덕무·박제가·유득공) 또는 실학사대가(實學四大家)라는 칭호를 얻게 됐다. 1785년(정조 9)에 시강원사서, 1786년(정조 10)에 홍문관교리를 거쳐 한성부판윤·평안도관찰사·형조판서·판중추부사 등의 벼슬을 역임하며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한편 이서구는 사가시인의 한 사람으로 한자의 구조와 의미를 연구하는 데에 조예가 깊었으며 글에 쓰이는 전고(典故) 또한 널리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서예에도 뛰어났다.
사가시인 중 이덕무·박제가·유득공가 서얼 출신인데 반하여 그는 유일한 적출이었고, 벼슬도 순탄하게 올라갔다. 그러나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외로움은 일생동안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렇기 때문에 벼슬보다는 은거(隱居)에 미련을 가졌다. 또 아들이 없음과 늙어감 그리고 벼슬을 한 일을 평생의 애석한 일로 여겼다.
그는 한번도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의 임무를 맡지 않았으나 홍대용(洪大容)과 박지원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 등의 실학파 문인들과 사귀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학문과 문학을 연마하며 당시 나라의 정세에 대해 토론했다.
이러한 폭 넓은 교우관계는 자연히 독창과 개성, 현실문제, 조선의 역사와 자연에 대한 관심을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데까지 나가게 했다.
이서구의 시는 그의 개인적 성향관계로 혁신적이거나 현실에만 치우치기보다는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인정이 두텁고 더불어 사색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사물을 관조하는 자세로 담백하게 높은 정신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많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자연과 고귀한 내면의 깊이를 아울러 그려냄으로써 시의 격조를 높이는 데 힘썼다.
문집으로 『척재집(惕齋集)』16권 7책과 『강산초집(薑山初集)』4권 1책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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