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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공원 이경여선정비(中央公園 李敬輿善政碑)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중앙공원 이경여선정비(中央公園 李敬輿善政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0. 2. 8. 19:22

 

조선 인조대에 청주목사를 지낸 이경여의 선정을 기려 인조 9년(1631)에 세운 비석으로 청주시 중앙공원(中央公園) 내에 있다. 비제는 일부 훼손이 있으나, “行牧使…德善政碑(행목사…덕선정비)”이며, 좌측면에 “淸白我公 勒之貞珉 化浹仁明 永留風聲 (청백아공 늑지정민 화협인명 영유풍성)”이라는 선정을 찬양하는 명문이 있다.

 

 

이경여의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직부(直夫)이며, 호는 백강(白江)·봉암(鳳巖)이다. 목사 이수록(李綏祿)의 아들이다. 1601년(선조 34)에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증광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611년 검열, 1617년에는 충원현감을 지냈다. 광해군(光海君)의 실정이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취임하고,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로 호종(扈從)하고, 이어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이 되었다.

1630년(인조 8)에 부제학을 거쳐 청주목사가 되어 선정을 펼쳤다. 이어 좌승지와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631년에는 현재의 중앙공원(中央公園)에는 “청백아공 늑지정민 사협인명 영유풍성(淸白我公 勒之貞珉 仕浹仁明 永留風聲)” 이라 찬양한 청덕선정비가 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그 뒤 이조참판으로 대사성을 겸임하여 선비양성의 방책을 아뢰었고, 이어 형조판서에 올랐다. 1642년에는 배청친명파(排淸親明派)로서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은 것을 이계(李烓)가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심양에 억류되었다가 이듬해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귀국하여 우의정이 되었다.1644년 사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다시 억류되었으나, 그 동안 본국에서는 영중추부사라는 벼슬을 내렸다. 이듬해 귀국, 1646년 민회빈강씨(愍懷嬪姜氏)[昭顯世子嬪)]의 사사(賜死)를 반대하다가 진도에 유배되고, 다시 1648년 삼수에 위리안치되었다. 이듬해 효종이 즉위하자 풀려나와 1650년(효종 1)에 다시 영중추부사가 되었다.이어 영의정으로 다시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뒤 청나라의 압력으로 영중추부사로 전임하였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충청남도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전라남도 진도의 봉암사(鳳巖祠)와 전라북도 고창 흥덕(興德)의 동산서원(東山書院)에 제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