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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탑면 장천리 장미산성(中央塔面 長川里 薔薇山城)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중앙탑면 장천리 장미산성(中央塔面 長川里 薔薇山城)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0. 7. 27. 17:43

 

오랫만에 장미산성을 찾았습니다.

장미산성을 향한 좁은길을 오르니 장미산성이 맞이해줍니다.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장미산 능선을 따라 축조된 삼국시대 산성.


장미산성은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장천리·가흥리·하구암리 일대에 솟아 있는 해발 337.5m의 장미산(薔薇山·長尾山) 정상부와 계곡을 포함하여 축조된 둘레 2,940m의 삼국시대의 대규모 포곡식(包谷式) 석축산성이다.

 

 

충주산성은 삼국시대 석성임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으나 아직까지 구체적인 축성 경위를 파악할 만한 자료는 없다. 

다만 충주산성과 마찬가지로 남매축성 설화가 전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충주시 노은면의 가마골이라는 마을에 장미라는 남동생과 보련이라는 누이가 살고 있었는데 둘 다 명산 정기를 타고나서 장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한 집에서 장수가 둘이 출생하면 다른 하나는 반드시 희생을 당해야 한다는 관습에 따라 성 쌓기 내기를 하게 되었다. 누이 보련은 노은에서, 장미는 가금[현 중앙탑면]에서 각각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아들인 장미보다 보련의 속도가 빠르자 어머니는 아들을 돕기 위해 딸이 성을 쌓고 있는 산으로 떡을 해가지고 가서 “네가 너무 빠르니 이 떡 좀 먹고 쉬었다 쌓도록 하라.”며 떡을 펴놓았다.

보련이 떡을 먹으며 쉬었다가 마지막 돌 한 개를 가지고 올라가는 중에 장미는 성 쌓기를 끝냈다. 결국 성 쌓기 내기에서 진 보련은 집을 떠나게 되었는데, 이튿날 저녁 보련의 집을 향하여 큰 별이 떨어졌다고 한다. 이후부터 보련이 성을 쌓은 산을 보련산, 장미가 성을 쌓은 곳을 장미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장미산성에 대한 여러 차례의 조사 결과 출토된 유물들이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반으로 편년되는 점, 토기류 등 한성백제기의 유물이 다수 확인되는 점, 이 시기가 장수왕의 남하정책과 관련된 시기로 주변에 충주 고구려비가 남아 있는 점 등으로 보아 이 지역이 일찍이 백제 지역으로 있다가 5세기 말경에 고구려의 영역으로 바뀌었던 역사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장미산성에 자리한 봉학사의 모습입니다.

 

장미산성의 성벽은 석축 성벽 이전에 판축의 토축 성벽이 존재할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였지만, 처음 축성부터 석축으로 축조되었음이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성벽은 성벽을 축조할 곳에 계단상으로 암반층을 정리하여 외벽의 기단부터 축조하였는데 안쪽으로 북돌을 채워 넣고 빈틈에는 잡석으로 채워 올리다가 내성벽과 수평이 되는 지점에서부터 내벽과 외벽을 동시에 구축하면서 북돌을 정연하게 채워 넣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외벽이 붕괴되어도 내부 북돌층이 견고하게 남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설축(設築)한 후 성벽 내측의 빈 공간에 점질토와 사질토를 층층이 다져 누수로 인한 성벽의 붕괴를 최소화하였다. 석축의 최하 단위는 성벽 높이 6m, 윗면 너비 3m이며 곳에 따라서 높이 6.9m, 너비 5.1m까지 넓혀 축조하였다.

2. 치성

장미산성의 치성은 북쪽의 능선, 동벽의 능선 3개소와 동남 각부의 능선, 서벽에 3개소, 그리고 북벽 동측 지점에 1개소 등 모두 9개 지점에서 확인되었다. 이중 서쪽 성벽이 북쪽으로 이어져 남동쪽 방향으로 회절하는 북서쪽 회절부 외측 지점의 치성은 발굴조사 결과 석축성벽을 쌓은 후 시설한 것으로, 장방형으로 목책을 돌려 마련하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장축이 11m 정도이고 폭은 3.7m 가량의 규모이다.

주간거리는 180㎝ 내외로 주혈의 지름이 70㎝~90㎝, 깊이 40㎝~60㎝이다. 이 치성은 북쪽에서 접근하는 적의 관찰을 용이하게 하는 동시에 내만된 계곡부로 침투하는 적을 적절하게 차단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와 같은 목책의 치성은 청원 남성골 산성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장미산성에는 성벽 내측으로 배수로를 시설하여 침수로 인한 석축성벽의 붕괴를 예방하였다. 배수로는 폭 40㎝~50㎝ 정도의 크기로 성벽 상면보다 조금 낮게 ‘U’자형으로 시설하였는데, 이는 우수가 배수로로 흘러내리도록 배려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장미산성의 성벽 조사에서는 성내에서 성벽을 통과하는 수구 시설이 확인되지 않은 점으로 볼 때, 경사지에서 흘러내린 물이 성벽의 윗면을 통과하는 ‘월류식(越流式)’ 배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조적 특성상 배수되는 성벽의 외측면은 다른 곳보다 치밀하게 축조하였으며, 바닥에는 점질토를 깔고 석재를 놓은 다음 석재 틈을 잡석으로 채워 넣어 성벽 기단부의 훼손을 최소화할 수 있게 하였다.


석환을 이용한 투석전(投石戰)은 특별한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 적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이었다. 장미산성 내에는 성벽과 근접하여 석환(石丸)을 비축하기 위한 석곽 시설이 확인되었다. 확인된 석곽은 180㎝×220㎝, 240㎝×240㎝, 260㎝×260㎝ 등 비교적 다양한 크기로 밝혀졌으며, 부정형의 석재와 할석을 이용하여 계단식으로 만들었는데, 여기에 크기와 모양이 다양한 천석(川石)을 비치하였다.

 

 

장미산성 내에서 모두 2기의 탄요가 확인되었다. 30° 가량의 경사면에 암반을 굴착하여 조성하였으며,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반지하식의 구조이다. 장축 3m, 단축 2m, 높이 1.1m의 크기이다. 요 내부에는 판석을 대고 점토를 발라 완성한 연도가 확인된다. 바닥면에서 토기편 등이 발견되지 않고 소성실에 두꺼운 숯층이 깔려 있어 제탄(製炭)을 위한 탄요로 추정되었다. 방사성 탄소연대측정 결과 1호가 1110AD, 2호 1200AD로 측정되었다.


장미산성에서 출토된 유물은 토기류와 철기류가 대부분이다. 토기는 원저단경호를 비롯하여 세격자문이 시문된 토기병, 점열문과 파상문이 새겨진 토기발 등을 비롯하여 각종 구연부편 등이 출토되었다. 이중에서 장미산성의 초축 연대를 알려주는 것으로는 조족문(鳥足紋) 토기를 비롯한 원저단경호 등 한성백제기의 유물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철기류는 대부분 무기류로 일부 농기구가 확인된다. 무기류는 철촉과 갑옷에 사용된 소찰갑 등이며 농기구로는 보습편 등이 출토되었다. 이중에서 철촉은 그 형태로 보아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으로 편년되고 있어 토기류와 동일한 시기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충주 지역은 원래 백제의 영역에 속해 있다가 5세기 말경 고구려의 영역으로 바뀌었고, 557년(신라 진흥왕 18)에 국원 소경으로 삼고, 이듬해 귀족의 자제와 육부의 호민을 이주시키면서 신라의 영역이 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보면 장미산성은 백제-고구려-신라로 이어지는 소속국의 변화를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임을 알 수 있다.

 

누군가 쌓아놓은 돌탑이 참 좋습니다.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장천리에서 장미산에 있는 산성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중앙탑면 장천리 잣고개의 뒷산 1㎞ 지점에 ‘장미산’으로 불리는 산이 있으며, 이곳에 ‘장미산성’이 있다.

「장미산성 전설」은 아들 장미와 딸 보련이라는 남매 장수가 생사를 건 성 쌓기 내기를 하는 과정에서 축성한 성이라는 축성유래담이다.


1982년 충청북도에서 간행한 『전설지』에 수록되어 있는데, 당시 가금면[현 중앙탑면] 장천리에 거주하고 있던 주민 홍우섭과 노은면 연하리에 살고 있던 주민 김종수로부터 채록한 것이다.


삼한시대 중원군 노은면 가마골마을에 장미라는 남동생과 보련이라는 누이가 살았다. 그러데 둘 다 장수의 기질을 타고 태어났다. 한 집안에서 장수가 둘이 출생하게 되면, 한 명은 죽어야만 하는 비운을 안고 있었다. 그리하여 두 남매는 생사를 건 시합을 하기로 했다. 장미는 장미산에 성을 쌓고, 보련은 보련산에 성을 쌓는 시합이었다.

시합을 하는 과정에서 어머니가 보니 보련이가 앞서고 있었다. 장미를 살리고 싶은 어머니가 떡을 해가지고 가서 보련에게 먹고 하라고 하였다. 보련이 떡을 한 접시 먹고 마지막 돌을 들고 가려는데 장미 쪽에서 축성이 끝났다고 하였다. 보련이 진 것은 떡 한 접시를 먹은 시간 때문이라고 한다. 내기에 진 보련이는 스스로 연못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장미산성 전설」의 주요 모티프는 ‘남매의 생사를 건 시합’으로, ‘오뉘힘내기 전설’의 원형적 작품이다. ‘오뉘힘내기 전설’은 우리나라 전역에 광포되어 있는 전설의 하나이다. 오누이가 생사를 건 성 쌓기 내기에서 동생 장미가 이기고 누이 보련이가 진다는 이야기로 남아선호사상이 나타나 있는 비극적 장수설화이다. 이외에 충주 지역에서 오뉘힘내기를 다룬 전설로는 「충주산성과 오뉘힘내기 전설」, 「보련산성 전설」 등을 들 수 있다. 충주 장미산성은 1997년도에 사적 제400호로 지정되어 그 역사적 가치를 더 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