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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평면용정리쌍오비각(草坪面 龍亭里雙梧碑閣) 본문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이시발의 신도비.
이시발[1569~1626]은 인조 대의 문신으로, 1596년(선조 29)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였으며 북변(北邊)을 방비하기 위해 함경감사로서 포대와 성곽을 보수하였다.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체찰부사(體察副使)로서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남한산성의 축성을 감독하다가 순직하였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익이다.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에서 국도 34호선을 따라 증평 방향으로 달리다 초평면소재지 삼거리에서 지전마을로 들어가기 전 좌측 양촌마을로 가는 지전교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이시발 신도비는 방형 대좌 위에 높이 175㎝, 너비 100㎝, 두께 29㎝의 오석으로 된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얹었다. 이수는 앞면에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잡고 다투는 형상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여의주를 잡고 있는 한 마리 용이 새겨져 있으며, 이수 옆면과 주위는 운문(雲文)으로 처리하였다. 대좌의 규모는 높이 57㎝, 너비 172㎝, 두께 121㎝로 앞면은 삼단으로 구분하여 밑으로부터 인동문, 당초문, 연화문의 순서로 새겼다.
전액은 ‘증 의정부 좌찬성 행형조판서 이공 신도비명(贈議政府左贊誠行刑曹判書李公神道碑銘)’으로 새겨져 있으며, 이정영이 썼다.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宋浚吉)이 썼다.
이시발 신도비는 보호각인 쌍오비각(雙梧碑閣) 내에 부친인 이대건(李大建)의 신도비와 나란히 세워져 있으며, 비석의 보존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이시발 신도비 전면은 주차장 및 편의시설[파고라]이 자리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초평천이 흐르며 그 위에 양촌마을로 통하는 지전교가 자리하고 있고 동남쪽으로 지전마을, 동쪽으로는 이시발·이대건 묘, 이시발 부인인 고령신씨 묘소 등 관련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1984년 12월 31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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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 이대건의 신도비.
이대건(李大建)의 본관은 경주로, 고려 후기 유학자로 명성이 드높았던 익재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다.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나 25세라는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아들이 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된 이시발(李時發)이다.
이시발이 임진왜란 때 의병장 박춘무(朴春茂)를 따라 공을 세운 데 이어 1596년(선조 29)에는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고, 1624년(인조 2) 체찰부사로서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자 조정에서 아버지인 이대건에게 의정부좌찬성을 추증하였다. 이에 경주이씨 문중에서 1658년(효종 9) 이대건 신도비를 건립하였다.
진천에서 국도 34호선을 따라 증평 방향으로 가다가 초평농공단지를 지나면 초평면 용정리가 나온다. 이대건 신도비는 마을 안에 아들 이시발 신도비와 함께 ‘쌍오비각’이라고 편액한 보호각 안에 세워져 있다.
방형 대석 위에 높이 150㎝, 너비 85㎝, 두께 25㎝의 오석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올렸다. 이수의 앞면은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이며, 뒷면에는 여의주를 잡고 있는 한 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다. 대좌의 앞면은 둘로 구분하여 인동과 연화문을 새겼다.
비의 앞면에 ‘증이조판서성균진사이공신도비명(贈吏曹判書成均進士李公神道碑銘)’이라고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의 문인이자 학자인 최립(崔笠, 1539 ~1612)이 비문을 짓고, 손자인 이경휘(李慶徽, 1617~1669)가 썼다. 전서(篆書)는 당대 전서와 주서에 뛰어났던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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