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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읍산척리이상설동상(鎭川邑山尺里李相卨銅像) 본문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진천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이다. 1870년(고종 7) 12월 7일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이행우(李行雨)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전 이조참판 이용우(李龍雨)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1894년(고종 31) 이상설(李相卨)은 조선 왕조 마지막 과거인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춘방시독관에 제수되고 다음해 비서감비서랑, 1896년 성균관교수·관장, 한성사범교관, 탁지부재무관, 궁내부특진관[1904년], 법부협판(法部協辦) 및 학부협판[1905년 9월],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1905년 11월]에 임명되었으며, 이 무렵 헐버트와 친교를 맺고 영어·프랑스어 등 외국어와 수학·물리·경제학 등 신학문을 공부했다.
1904년(고종 41) 일제가 황무지의 개간권을 요구하자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해 8월 보안회의 후신으로 결성된 대한협동회의 회장에 선임되었다. 다음 해 법부협판·의정부참찬을 지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 늑결 결사반대와 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5차례 올렸다. 12월에 체직되어 관복을 벗고 국권회복 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민영환(閔泳煥)의 순국 소식을 듣고 종로에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다음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06년 이동녕·정순만 등과 조국을 떠나 상하이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러시아령 연추(煙秋)로 가서 이범윤(李範允)과 국권회복 운동의 방략을 협의하였다. 간도 용정촌에 가서 근대적 항일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신학문과 항일 민족교육을 실시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다음해 문을 닫았다.
1907년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고종은 은밀히 이상설을 정사로 하고 이준(李儁)과 이위종(李瑋鍾)을 부사로 삼아 특사로 파견했다. 5월,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르러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하고 헤이그에 도착했다. 그들은 대한제국의 실정과 국권회복 문제를 제기하고자 했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6월 대한제국의 정당한 주장을 밝힌 「공고사(拱告詞)」를 만국평화회의와 각국 위원에게 보냈고, 7월에는 이위종이 국제협회에서 「한국의 호소」를 연설하여 국제 여론에 한국 문제를 부각시켰다.
회의 참석이 끝내 거부되고 7월 14일 이준이 헤이그에서 순국하자 이상설은 그곳 공원묘지에 이준을 매장하였다. 이후 영국·프랑스·독일·미국·러시아 등 여러 나라를 직접 순방하면서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이 동양 평화의 관건임을 주장, 대한제국의 영세 중립화를 역설했다. 헤이그 특사사건을 들어 일제는 특사를 위칭(僞稱)했다고 하여 이상설을 재판에 회부, 궐석 판결로 사형을 선고하고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하는 한편 선위(禪位)라는 미명으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다.
1908년 미국에 건너가서 대한제국의 독립 지원을 계속 호소하는 한편, 같은 해 8월에는 콜로라도주 덴버시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회에 연해주 한인 대표로 참석했다. 1909년 국민회(國民會) 중심의 독립운동 확대를 위해 정재관(鄭在寬)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이승희(李承熙)·김학만(金學滿)·정순만(鄭淳萬) 등을 규합해 러시아의 만주 국경 지방 흥개호 남쪽 봉밀산 부근에 한인을 이주시키고 최초의 독립운동 기지라 할 수 있는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했다. 헤이그 사행을 이어 특사 일행이 사전 계획대로 구미 열강에 대한 최후의 구국 순방외교 소식을 들은 대한제국 국민은 일제의 침략에 분개하고 의열사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준 열사의 순국 외에도 이한응(李漢應) 열사의 순국[1905년]과 1908년 3월 23일 전명운(田明雲)·장인환(張仁煥) 의사의 스티븐스 처단 의거, 그리고 1909년 이재명(李在明) 의사의 이완용(李完用) 응징이 있었다. 특히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安重根)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 응징하였다. 안중근 의사는 평소부터 이상설을 숭모하고 있었으며 재판 때의 조사서를 보면 이상설이 안중근 의사로 하여금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하라고 지령을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1910년 국내외의 의병을 통합하여 보다 효과적인 항일전을 수행하고자 의병을 규합하여 13도의 군을 편성, 도총재에 유인석(柳麟錫)을 선임하고 고종에게 13도의 군 편성을 상주하고 군자금의 하사와 고종의 아령파천(俄領播遷)을 권하는 상소문을 올려 망명정부의 수립을 시도했다.
8월에 한일합방이 될 것이라는 소식이 오자 연해주와 간도 등의 한족을 규합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고 한일합병의 반대운동을 전개했고, 미국·러시아·중국 등에 일제의 침략 규탄과 한민족의 독립 결의를 밝히는 8,624명의 성명회 선언서를 보냈다. 이해 일제의 교섭에 의해 러시아 관헌에 체포되어 이르쿠츠크로 추방되었으나, 다음해 석방되어 다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석방되어 김학만·이종호(李種浩)·정재관(鄭在寬) 등과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여 『권업신문(勸業新聞)』을 간행하고 한인학교를 확장시키는 한편, 한인교포의 경제 향상과 항일 독립운동을 위한 기관으로 발전시켰다.
1913년 12월, 어떤 사이비 애국자가 이상설을 매장하기 위하여 일제의 밀정으로 몰려는 음모를 듣고 그는 변명 없이 모든 공직을 사임한 뒤 하바롭스크로 이주하였다. 이때에 시를 읊었으니, “나라를 잃어 나라를 울고, 집을 떠나 집을 울고, 이제 몸 둘 곳조차 잃어 몸을 우노라[泣國泣家又泣己].”라고 하였다. 1914년 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정재관 등과 함께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대한광복군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일본과 러시아가 연합국으로 동맹하여 한인의 정치 활동을 엄금했기 때문에, 표면적인 활동을 하지 못한 채 해체되었고 권업회마저 러시아 관헌에 의해 해산되었다. 1915년 상하이에서 박은식(朴殷植)·신규식(申圭植)·조성환(曺成煥) 등과 신한혁명당을 조직하여 본부장에 선임되었다. 이후 이상설은 1917년 3월 2일 망명지인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상설은 그의 임종을 지킨 이동휘·이회영 등의 동지들에게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했으니 몸과 유품은 불태우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이에 따라 유해는 화장되고 문고도 모두 불태워졌다.
1962년 정부는 이상설의 공적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971년 보재 이상설 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그의 출생지에 숭모비(崇慕碑)를 건립하고, 1975년 숭렬사(崇烈祠)를 건립하였으며, 존영을 봉안하였다. 1997년 생가에 동상과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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