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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평면용정리쌍오비각(草坪面 龍亭里雙梧碑閣)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진천군(鎭川郡)

초평면용정리쌍오비각(草坪面 龍亭里雙梧碑閣)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0. 10. 13. 10:08

 

 

 

 

 

 

 

 

 

 

 

 

 

 

 

 

 

 

 

 

 

 

  • [정의]

  •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이시발의 신도비.

  • [개설]

  • 이시발[1569~1626]은 인조 대의 문신으로, 1596년(선조 29)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였으며 북변(北邊)을 방비하기 위해 함경감사로서 포대와 성곽을 보수하였다.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체찰부사(體察副使)로서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남한산성의 축성을 감독하다가 순직하였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익이다.

  • [위치]

  •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에서 국도 34호선을 따라 증평 방향으로 달리다 초평면소재지 삼거리에서 지전마을로 들어가기 전 좌측 양촌마을로 가는 지전교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 [형태]

  • 이시발 신도비는 방형 대좌 위에 높이 175㎝, 너비 100㎝, 두께 29㎝의 오석으로 된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얹었다. 이수는 앞면에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잡고 다투는 형상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여의주를 잡고 있는 한 마리 용이 새겨져 있으며, 이수 옆면과 주위는 운문(雲文)으로 처리하였다. 대좌의 규모는 높이 57㎝, 너비 172㎝, 두께 121㎝로 앞면은 삼단으로 구분하여 밑으로부터 인동문, 당초문, 연화문의 순서로 새겼다.

  • [금석문]

  • 전액은 ‘증 의정부 좌찬성 행형조판서 이공 신도비명(贈議政府左贊誠行刑曹判書李公神道碑銘)’으로 새겨져 있으며, 이정영이 썼다.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宋浚吉)이 썼다.

  • [현황]

  • 이시발 신도비는 보호각인 쌍오비각(雙梧碑閣) 내에 부친인 이대건(李大建)의 신도비와 나란히 세워져 있으며, 비석의 보존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이시발 신도비 전면은 주차장 및 편의시설[파고라]이 자리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초평천이 흐르며 그 위에 양촌마을로 통하는 지전교가 자리하고 있고 동남쪽으로 지전마을, 동쪽으로는 이시발·이대건 묘, 이시발 부인인 고령신씨 묘소 등 관련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1984년 12월 31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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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의]

  •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 이대건의 신도비.

  • [개설]

  • 이대건(李大建)의 본관은 경주로, 고려 후기 유학자로 명성이 드높았던 익재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다.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나 25세라는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아들이 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된 이시발(李時發)이다.

  • [건립경위]

  • 이시발이 임진왜란 때 의병장 박춘무(朴春茂)를 따라 공을 세운 데 이어 1596년(선조 29)에는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고, 1624년(인조 2) 체찰부사로서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자 조정에서 아버지인 이대건에게 의정부좌찬성을 추증하였다. 이에 경주이씨 문중에서 1658년(효종 9) 이대건 신도비를 건립하였다.

  • [위치]

  • 진천에서 국도 34호선을 따라 증평 방향으로 가다가 초평농공단지를 지나면 초평면 용정리가 나온다. 이대건 신도비는 마을 안에 아들 이시발 신도비와 함께 ‘쌍오비각’이라고 편액한 보호각 안에 세워져 있다.

  • [형태]

  • 방형 대석 위에 높이 150㎝, 너비 85㎝, 두께 25㎝의 오석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올렸다. 이수의 앞면은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이며, 뒷면에는 여의주를 잡고 있는 한 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다. 대좌의 앞면은 둘로 구분하여 인동과 연화문을 새겼다.

  • [금석문]

  • 비의 앞면에 ‘증이조판서성균진사이공신도비명(贈吏曹判書成均進士李公神道碑銘)’이라고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의 문인이자 학자인 최립(崔笠, 1539 ~1612)이 비문을 짓고, 손자인 이경휘(李慶徽, 1617~1669)가 썼다. 전서(篆書)는 당대 전서와 주서에 뛰어났던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이 썼다.